전화가 울린다. 경찰서다. 피의자로 출석하란다. 눈앞이 캄캄하다. 여기 저기 수소문해본다. 변호사와 상담도 해본다. 선임하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 불안하여 잠도 잘 안 온다. 드디어 운명의 날. 사법경찰관의 신문이 날카롭다.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신문이 끝나고 엉겁결에 피의자신문조서에 서명하고 무인을 한다. 그렇게 끝나니 다시 불안이 엄습하여 온다. 다른 자리를 보니 행색 좋은 피의자 옆에 변호인이 동석하고 있다. 돈이 없어 이렇게 홀로 수사를 받았다는 생각이 드니 뭔지 모를 억울한 마음이 밀려온다. 이건 정말 억울한 일일까?

헌법에는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다만, 형사피고인이 스스로 변호인을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가 변호인을 붙인다”고 규정되어 있다. 문구대로 읽으면 피의자에게는 국가가 변호인을 붙이지 않더라도 헌법위반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헌법을 조문의 언어 안에서만 해석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연관된 맥락을 살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거나,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 등을 받지 않는다는 헌법 규정들도 있다. 적법한 절차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발전시켜 온 법의 적정절차(due process of law)를 의미한다.

국가형벌권의 표적이 된 모든 사람의 절차적 기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때에야 비로소 법의 적정절차는 지켜지는 것. 따라서 처벌의 위험에 놓인 모든 사람에게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인정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특히 수사절차는 제3자의 눈에서 벗어나 밀행으로 진행되니 피의자의 인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높다. 피의자신문을 통하여 확보된 증거들은 유무죄를 가르기도 한다. 따라서 피의자 단계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필요성과 실익은 공판절차의 경우보다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피의자에게도 헌법상 국선변호인 선임청구권을 보장한다고 보는 것이 법의 적정절차에 부합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형사소송법에서도 제한적으로만 피의자 국선변호인을 인정하고 있다.

새 정부에서 추진하는 형사공공변호인 제도의 본질은 피의자 국선변호인의 보편적 보장이다. 법의 적정절차 실현에 크게 기여할 방안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한변협이 위 제도가 권력분립에 역행한다며 반대성명을 냈다.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변호인의 지위에 대한 변협의 고민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변협이 내세운 막대한 예산 소요, 선임절차의 신속성이나 선정기준 문제는 앞으로 논의하며 정리할 수 있다. “수사기관 스스로 인권침해 근절노력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다른 국가기관이 인권침해를 방지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변협의 주장에도 허점이 있다. 수사기관은 진실발견을 내세워 위법을 저지를 위험이 큰 존재이다. 이것은 역사적 경험이다. 거기에 다른 국가기관이 개입하여 감시한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무엇인가. 보는 눈이 많을수록 수사절차가 가시화(可視化)되어 위법의 위험은 줄어드는 법. 그것도 변호사들이 참여하는 제도라면 더더욱. 관건은 변협의 고민처럼 국가권력의 부당한 개입 없이 변호인들의 독립적 변호활동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을 것이고, 이것은 함께 논의하여 풀면 된다. 변협이 이미 낸 반대성명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주도적으로 제도 설계에 적극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질문에 답을 할까. 그렇다. 억울한 일이다. 형사공공변호인 제도가 잘 만들어져 수사기관에 출석한 피의자 옆에 반드시 변호인이 참여하는 날이 올 때 그 억울함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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