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검토하고 피고인과 상담을 해 보면, 증거가 비교적 풍부하고 피고인 변소의 설득력이 낮은 사건이 더러 있다. 이 경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형을 위한 현실적인 조언을 해 줄 것인지 아니면 비록 승소 가능성은 낮더라도 피고인이 원하는 방향의 변론을 할 것인지, 형사재판에서 변호인이 항상 겪는 주된 딜레마이다. 특히, 피고인과 계속적인 유대 관계 형성을 통해 사건 수임을 해야 하는 일선 변호사들과는 다소 입장이 다른 국선전담변호사로서는 객관적인 조언을 상대적으로 더 할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항상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곤 한다.

재작년 의정부 지방법원 5호 법정 앞. 형사재판을 받으러 온 사람들과 옆 경매 법정 기일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로 복도는 북새통이었다. 그 때 한 중년 여인이 나를 향해 계속해서 큰 소리를 쳤다. “당신 이름이 뭐야? 당신 검사야 변호사야? 당신 결혼은 했어?” 그대로 인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위가 높은 발언이 계속 이어졌다.

그 중년 여인은 전 남편에 대한 허위사실을 전 남편의 현재 부인의 카카오스토리에 적시하여 명예훼손을 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중년 여인은 적시한 사실이 모두 진실이고 전 남편 부인이 꼭 알아야 되는 내용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시된 사실이 진실임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매우 부족하였고, 공공의 이익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담당재판부는 유사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사건에서 피고인이 번의하여 인정한 경우 크게 선처를 해 준 적이 있었다. 나는 합의를 하거나 번의해서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하다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피고인에게 알렸지만, 피고인의 입장은 완강했다. 보안사 수사관 출신이라는 그녀의 아버지는 연일 청와대까지 이 사건을 끌고 갈 테니 반드시 무죄를 받아야만 한다고 전화를 하곤 했다.

피해자인 증인이 불출석한 그날. 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설득을 해 봤지만, 흥분한 중년 여인은 나에게 가득한 원망을 쏟아 부었다. 계속 이 상태로 변론을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나는 국선전담을 하면서 처음으로 재판부에 사임 신청을 하였고 다른 국선변호사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밀려오는 미안한 마음에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증인 반대신문사항과 몇 가지 입증계획 등을 등기우편을 통해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상당히 높은 형을 선고받고 소송비용까지 부담하게 된 그녀는 그 때 ‘검사 같았다’던 그 변호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도 어떤 피고인들은 시국사건을 변론하면서 법정에서 퇴정 당했던 변호사들처럼, 탄핵사건 때 점심 먹는 문제로 재판부와 날을 세우고 태극기를 펼쳐보이던 모 변호사들처럼 왜 자신들을 위해서 열심히 변론을 하지 않느냐고 타박하곤 한다.

이 사건 이후로는 되도록 피고인이 원하는 방향의 변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피고인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게 판단이 서지 않는다. 객관적인 조언자와 의뢰인의 대변자 사이에서의 딜레마.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계속 고민하면서도 풀지 못할 숙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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