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나온 여론은 사실일까. 공동체의 다양한 생각을 하나로 특정하기는 어렵다. 언론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여론을 조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사법부가 이를 바탕으로 판결을 낸다면? 조작된 여론을 수용하는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언론이 만든 여론 덕을 톡톡히 본 ‘국정농단’ 당사자가 있다. 최근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받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다. 재판부는 “당시 피고인은 외국 투기자본에 의한 국부유출 논란으로 국민연금공단이 이른바 백기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도 상당했던 관계로 국민연금기금의 주식 의결권 행사 기준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경솔하게 판단한 잘못을 자책하고 있다”고 문형표에 대한 양형 사유를 밝혔다. 어쩔 수 없는 여론 때문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했다는 취지다. 홍완선도 마찬가지다. 재판부는 당시 보도를 참작해 삼성 합병의 찬성을 압도적이라 전제했다. 과연 그럴까.

실상은 이와 다르다. 여론은 만들어졌다. 국정농단 공판 과정에서 나온 서류증거들이 이를 증명한다. 국민연금 투자위원회가 삼성 합병안에 찬성하기로 한 2015년 7월 10일 이수형 전 삼성 미래전략실 팀장은 장충기 전 미전실 사장에게 “모 경제 손 아무개 편집국장이 오후 8시 홍완선과 통화했다” “전문위원회로 안 넘긴다고 한다. 톱 나간다”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해당 언론사는 합병 직전 찬성을 지지하는 기사를 22꼭지나 생산했다. 7월 8일 황영기 한국금융투자협회장은 장 전 사장에게 “밖에서 삼성을 돕는 사람들이 많다. 모 뉴스 이 아무개 편집국장도 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재판부는 여론을 만든 ‘피고인’ 홍완선이 여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사법부의 신뢰를 해치는 요인 중 하나를 ‘자의적인 양형’으로 지목했다. 예를 들어 피고인의 특정 혐의가 여론과 맞닿기 때문에 형을 줄일 수 있다는 식이다. 만약 피고인의 범행이 여론에 싸늘하다면, 형량을 달게 받으라는 말인가. 사법부의 판단은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문형표와 홍완선에게 적용된 감형 사유는 자신들이 개입한 여론 때문이었다. 이는 공판 과정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여론을 지렛대 삼아 피고인에게 감형을 선물했다. 국민 신뢰를 최우선 과제로 두는 사법부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아, 물론 ‘조작’에 가담한 언론도 포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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