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할 때가 가끔 있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낭만으로 자리 잡은 절물휴양림이나 한라생태숲을 걷기도 한다.

이 숲의 어귀에 사랑나무로 알려진 연리목(連理木)이 있다. 수령 100년, 수고 8미터쯤 되는 고로쇠나무와 때죽나무가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1.5미터 이상 줄기를 맞대어 서 있다.

아름다운 동행에 탄성을 지르지만 각기 뿌리가 다른 나무가 서로를 압박하다가 껍질이 짓물러터지면서 둘이 한 몸이 되는 인고의 세월을 곰곰이 생각하면 가슴에 깊이 새길 교훈이러니라.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질그릇같이 까칠까칠하고 투박한 아내의 손을 살포시 잡는다. 나와 같이 더불어 쌓아 온 삼십 오년의 세월. 그 시간의 무게로 강고해진 아내의 살가운 정에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중국 당나라 시인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을 연리지에 빗대기도 했지만, 비익조(比翼鳥)나 연리지라 할지라도 아내의 그지없는 사랑에 견줄 수는 없겠지.

옛일을 생각하면, 고시생 시절에는 온갖 고통을 인내한 반려자, 새내기 변호사 시절에는 이름 없는 검소한 노예, 중년 변호사 시절에는 된장 같은 여자, 농부 변호사 시절에는 어느새 늙어 버린 누이 같은 아내가 아닌가.

의지할 혈연 하나 없는 제주에서 시집살이하면 보호자가 되고 강을 건너는 뱃사공이 되겠다고 언약했음에도 내 속은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아 쉴 곳을 찾아 날아온 아내에게 가시 돋친 말로 찌르기 일쑤였으니.

곯아도 젓국이 좋고 늙어도 영감이 좋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미운 감정 드러나서 탓도 하고 원망도 하면서도 고와도 내 남편, 미워도 내 남편이라고 말하는 아내의 다정함은 땅 속에서 솟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다.

거문고의 활줄이 지나치게 팽팽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느슨하지도 않고 적당한 음계(音階)에 맞추어졌을 때 선율은 아름답다. 늘그막 우리 부부의 정념도 이와 같아야 믿음으로 고해(苦海)를 건너고 사랑으로 두려움과 슬픔을 건널 수 있으리라.

2014년 3월 친목들과 함께 1박2일의 부부동반 여행에서 생긴 일이다. 해남의 두륜산 대흥사 경내에서 수령이 1000년쯤 된 느티나무 두 그루의 뿌리가 합쳐져 하나로 보이는 경이로운 형상을 본 적이 있다. 아내를 힐긋 쳐다보니 입가엔 웃음이 널려 있다. “천년의 사랑을 해줄 수 있겠어.”

불교경전 ‘어울리는 삶 경(A4:56)’에 나오는 금슬이 좋은 부부 이야기로 분위기를 띄운다. 부처님의 부모로 500생을 살았다는 부부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어. “저희는 지금 여기에서도 서로서로 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서로서로 보기를 원합니다.”

세존께서 이르기를 “여기 이 세상에서 둘 다 동등한 믿음과 계행과 베풂과 통찰 지(智)를 가지면 내세에서도 서로서로 보게 될 것이다.”

이 네 가지 어울리는 삶의 조건을 갖추어야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길에서 거문고와 비파를 타듯이 화락(和樂)하게 살고 늙어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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