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기타
[자유기고]두 얼굴의 변호사
박상흠 변호사  |  mose202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643호] 승인 2017.06.19  09:57:2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흑인 톰 로빈슨은 19세의 백인 여성 메이엘라 유얼의 집을 지나갈 때마다 옷장을 쪼개어 주는 일같이 작은 일을 도와줬다. 유얼의 집은 흑인마을과 백인마을의 경계지역에 놓여있었다. 그날도 유얼은 낡은 문에 경첩이 빗겨나갔다며 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톰이 확인해보니 문의 경첩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유얼은 다시 부탁했다. 의자에 올라가 옷장 위에서 상자를 꺼내달라고. 유얼은 의자에 올라간 톰의 두 다리를 꼭 껴안았고 놀란 톰은 그만 의자에서 넘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유얼이 넘어진 톰의 허리를 껴안고 톰의 뺨에 키스를 했다. 두려움에 도망가려던 톰은 문 앞에서 자신을 가로막고 서있던 유얼을 떠밀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톰. 그러나 유얼은 지난해 11월 21일 흑인 톰에게 자기 집의 옷장을 쪼개어주면 5센트를 주겠다고 제안 했고, 이를 받아들인 톰이 마당에 들어온 후 돈을 가지러 집에 들어가는 자신을 뒤에서 덮치며 목을 붙잡고 욕을 했다고 진술했다. 톰은 억울하게 체포된 후 재판을 받게 된다.

메이콤 주에서 존경받는 변호사 에티커스 핀치가 톰을 돕고자 국선변호인으로 나섰다. 핀치의 노련한 증인신문으로 알아낸 사실은 사건 당시 유얼은 오른쪽 눈이 부었고, 톰의 왼쪽 팔은 오른쪽 보다 30센티미터 짧았다. 그러나 유얼의 아버지 로버트 E. 리 유얼은 왼손잡이였고, 딸이 다쳤음에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무죄로 기울어진 재판이 평결에 의해 유죄로 결론 내려지고, 교도소에서 형 집행을 모면하고자 도망치던 톰은 총에 맞아 숨진다. 어린 딸 스카웃의 시선에 아빠 핀치 변호사는 재판정에서 인종편견과 싸우려했던 정의의 사도였다. 국선변호를 만류하는 스카웃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스카웃, 단순히 변호사라는 직업의 성격으로 보면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번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기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래. 이 문제에 관해 어쩌면 학교에서 기분 나쁜 말을 듣게 될지도 몰라.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아빠는 “다수결의 원칙에 좌우되지 않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인간의 양심”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존경스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변했다. 14년의 세월이 지나 스카웃의 흑인 유모 캘퍼니아의 손자가 실수로 교통사고를 내 백인을 치어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핀치변호사가 그를 돕기로 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소송에서 치열한 변론을 하기로 한 것이 아니라 자백을 권유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흑인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흑인 변호사단과 흑인배심원이 메이콤주 법원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인종편견으로 한 흑인 남성이 입게 될 억울한 누명을 막고자 법정에서 힘써 싸우던 아빠는, 이제 흑인의 권리가 확장되는 것과 싸우는 변호사로 변해버렸다. 아빠의 서재에는 흑인차별을 정당화하는 소책자가 꽂혀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빠는 인종편견을 조장하는 주민협의회의 임원이었다. 아빠의 변신에 모든 것이 어리둥절해진 스카웃이 아빠에게 질문했다. 아빠가 왜 변했냐고. 흑인을 보호해주던 아빠는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 핀치 변호사는 딸의 질문에 흑인 수가 백인 수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핀치는 자신은 재퍼슨주의자라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한표를 부여하는 보통선거의 원칙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유지한다면 백인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름으로 보통선거의 원칙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고 답한다. 스카웃은 혼란스럽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14년 전 아빠는 다수결의 원칙이 좌우하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의 양심라고 했는데, 지금 이 순간 동일한 원칙을 흑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입장을 바꿔버린 것이다.

아빠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예전에 자신이 어려서 보지 못했던 아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것일까. 하퍼 리가 지은 두권의 책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을 읽어본 독자라면 아무래도 후자에 무게를 둘 듯하다. 한편, 핀치의 변신은 최근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일부 법조인의 일탈현상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려주는 듯하다. 고위 공직자였던 그들이 변호사가 된 후 금전 앞에 무릎 꿇은 사건을 보며 우리는 두 얼굴을 가진 변호사를 목격했다. 좁아지는 송무시장, 전관예우의 폐해 때문이었을까. 내 생각엔 그들이 검찰청 혹은 법원에 몸담을 때 업무를 담당하며 상대했던 변호사들을 사익을 추구하는 대상으로써 경시의 대상으로 분류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은 공익을 추구하고 변호사들은 사익을 추구한 것으로 구분한 것이다. 법조인의 업무가 사익과 공익으로 명확히 구분될 수 있을까. 이 같은 오독(誤讀)은 두권의 소설을 통해 교정(矯正)되기를 기대해본다. 왜냐하면 결국 법조인의 고향은 변호사이며, 변호사의 첫 발걸음은 사익 도모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사익의 종착점은 공익 실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기자의 시선]“문 대통령님, 사법부 개혁대상 아니죠?”
2
[제50회 변협포럼]“남을 도울 때 더 큰 행복 느낄 수 있어”
3
[전문분야 이야기]애플과 삼성의 스마트폰 특허소송이 주는 교훈(2)
4
[법조나침반]로스쿨 유감에 대한 유감
5
[국회단상]국회와 변호사
Copyright © 2017 대한변협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koreanba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