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이후 우리에게 5월은 더 이상 봄이 아니었다. 학살자들의 정보조작으로 진실은 은폐·왜곡되었고, 희생자에게는 ‘폭도’라는 낙인이 찍혔다.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재평가된 지금도 그 상처는 아직 남아 있다. 심지어 상처를 덧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도 왜곡된 정보조작을 믿는 사람들, 이를 논란거리로 부추기는 일부 언론과 정치인, 지식인들이 그들이다. 홀로코스트를 믿지 않는 네오 나치들과 뭐가 다를까.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기억하여야 할 이유이다. 그 기억의 방법에는 음악도 있다.

잠시 러일전쟁의 패배로 민생이 파탄나면서 데모와 파업이 빈발하던 1905년 러시아로 가보자. 1월 9일 모스크바 광장은 황제에게 ‘자비’를 청원하기 위하여 행진하는 노동자들로 가득 찼다. 여자와 아이들도 많이 참가한 평화적 행렬이었다. 황제의 군인들은 무차별 발포하고 칼을 휘둘렀다.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대학살극이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중들 사이에서 황제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고 그해 10월 소비에트의 모체가 되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가 생겨난다. 결국 1917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전복된다.

혁명 후 소비에트 당국의 예술관은 초대 교육인민의원 루나차르스키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면 그 즉시 종교는 불필요하게 되고 따라서 비극의식도 삶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은 인간의 비극의식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천박한 예술관의 표적 중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있었다.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청중들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의하여 ‘퇴폐음악’으로 규정되었고 작곡가는 ‘혁명의 적’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에서 작곡가를 구해낸 작품이 혁명의 승리를 찬양한다고 알려진 제5번 교향곡이다.

그러나 논쟁을 유발하는 자서전인,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을 보면 쇼스타코비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기쁨은 공포 속에서 강화되고 창조된다. 그것은…누군가 당신의 머리를 막대기로 때리면서 ‘너의 작업은 기쁨이다’라고 말하면, 당신은 벌떡 일어나 ‘우리의 작업은 기쁨이오’라고 중얼거리면서 걸어가는 것과 같다.” 개선가를 내세우며 비극의식의 결여를 강요받는 역설 속에서 제5교향곡의 피날레는 비극성을 얻게 된다.

“대부분의 나의 교향곡은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묘비”라고 한 작곡가의 비극의식은, 소련군이 헝가리 민중들 학살한 이후 작곡된 제11번 교향곡에서 1905년 ‘피의 일요일’과 만난다. 마지막 순간에 경종(警鐘)을 울리며, ‘죽은 자들을 기억하라, 잊지 마라, 끝나지 않았다’라는 비극적 메시지를 전하는 이 곡을 들으면서 우리는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고 각성하게 해주는 비극의식의 힘을 느끼게 된다. 이 느낌은 1905년 러시아라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1980년 5월의 광주를, 더 나아가 모든 학살의 현장을 함께 기억하자는 감성의 공감대를 만들어낸다.

인간성을 부정하는 학살, 그 이후에 음악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비정한 세상에서 왜 우리는 음악을 듣는가. ‘증언’ 서문에 솔로몬 볼코프가 쓴 글을 떠올려본다.

“1958년 9월, 예프게니 므라빈스키가 레닌그라드 필하머닉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제11번 교향곡을 지휘했다. 1956년의 헝가리 봉기 후에 작곡된 교향곡 제11번은 민중과 지배자, 그리고 쌍방의 모순관계를 다룬 것으로, 특히 제2악장은 무방비 상태의 민중들의 처형을 사실적 진지함으로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 충격의 시학이었다. 내 일생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타인을 골똘히 생각하며 연주회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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