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서양 법학은 처음에는 실학자들과 중국을 통하여, 그 뒤 1880년대 개화기에는 일본을 통하여 소개되었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서양 법학 교육이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 법학서인 유성준의 ‘법학통론’이 출간된 해는 1905년이다(최종고, ‘한국법학사’, 박영사, 1990년 참조). 불행히도 근대법의 계수와 근대 한국 법학의 태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맞물리면서 상당히 왜곡되고 만다. 보불 전쟁의 결과를 보고 독일제국의 발흥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프랑스법 대신 독일법 계수를 택하였고, 그것이 고스란히 식민지 한국에 ‘이식’ 또는 ‘계수’되었다. 해방 이후 영미법의 영향이, 예컨대 형사소송법에, 다소 스며들었지만, 일제 치하부터 내려온 법과 사법(司法) 체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게 100년이 넘도록 한국은 대륙법체계의 국가였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한국의 법학은-비록 암기식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개념과 법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법해석이 가능하도록 교육되어 왔다. 한국의 법률가는, 미국과는 달리, 기본 개념과 법리를 익히면 어떤 법문제도 풀어나가거나 비판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도록 양성되어 왔다.

그런 나라에 보통법 전통에 기초한 미국의 로스쿨 제도를 도입하였으니 법학에 미치는 파장 자체가 클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당시 참여정부의 의도야 어떻든, 법과대학 교수들은 다수의 졸업생에게 변호사 자격을 부여하게 되면 사법시험 제도로 인하여 피폐화된 법학교육이 정상화되고 다양한 학부 전공자들로 법학 분야도 다변화되어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결과는? 학문으로서의 법학은 몰락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론법학 연구자 수는 물론이고 법학서의 독자 수와 법학강의의 수강자 수도 현저히 줄어들어 법학의 물적 토대가 무너졌다. 로스쿨이 설립되면서 도입된 다양한 과목들은, 변호사 시험과 상대평가의 학점 부담을 안고 있는 학생들의 불안으로 인하여, 수강생 수를 채우기 어려워 학기마다 폐강을 고민하여야 할 지경이다. 법과대학을 마치지 않은 학생들을 상대로 3년 안에 이론과 실무 교육을 다 마쳐야 하니 기초 개념과 법리에 대한 학생들의 평균적 이해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변호사 시험에 맞추다보니 판례 중심으로 로스쿨 교육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법학이 실용학문이라고 해도 이처럼 판례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법학 교육은 대단히 위험하다. 지금은 옳다고 여겨지는 판례나 통설도 언젠가는 다른 이론으로 극복 또는 전환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학문과 사상의 역사이다. 예컨대 독재정권 치하의 형사절차는 실체진실주의와 직권주의가 주도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당시 소수설(차용석, 강구진)이 지지하던 적정절차와 당사자주의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론법학의 힘은 그런 것이다. 실무에 매몰되면 소수의 관점에 서기 쉽지 않다. 실무경험이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이론법학자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만으로는 당대의 법정신을 이끌 대(大)법학자를 길러낼 수 없을 것 같다. 단순히 법조인 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법학 교육 자체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이론법학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적어도 교양법학을 통하여 법학의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데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박찬운 교수의 주장처럼 로스쿨이 있는 대학교의 법과대학을 부활하는 방식으로 첫 단추를 끼울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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