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5층에는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축소해놓은 공간이 있다. 관람객들은 대통령 전용 의자에 앉아보거나 벽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감상한다.

몇해 전 박물관을 찾았다가 한 여자애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얼굴을 가리키며 부모에게 “저 분이 박근혜 대통령 아버지야”라고 묻는 것을 우연히 봤다. ‘박근혜 대통령’을 또박또박 발음할 때 존경심이 묻어났다. 대통령 하면 머리가 하얀 양복 차림의 남자만 떠올리던 아이들에게 여자 대통령은 분명 색다른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소녀가 장차 이 나라의 지도자, 대통령이 되려는 포부를 품었을지 모른다. 그런 아이들한테 대통령 파면과 구속기소가 부디 상처로 남지 않길 바란다.

“앞으로 100년 안에 여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등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비헌법적인 비뚤어진 인식과 행태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지난 2월 탄핵에 반대하는 일부 여성이 헌법재판소에 낸 탄원서의 한 구절이다. 실제로 검찰과 특검 수사, 그리고 헌재 탄핵심판 내내 ‘암탉이 우니 집안이 망했다’는 식의 저급한 여성 비하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대통령 변호인단마저 검찰의 대면조사 요구를 거부하며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 사생활이 있다”고 항변하거나 헌법재판관들에게 “왜 약한 여자 편을 안 드느냐”고 호통을 쳤다. 참다못한 여성단체들이 나서 “여성은 약하니 특별한 보호라도 받아야만 한다는 의미냐”고 규탄했다.

여자든 남자든 대통령 같은 공적 존재에게 국민 모르게 누릴 사생활이란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이 약하다는 것도 궤변이요, 엄살에 불과하다. 대통령 변호인단이 의도적으로 꺼내든 ‘약한 여자’ 프레임은 일각의 여성 비하 못지않게 국민적 분노를 샀다.

2012년 대선 후 그를 지지했든 반대했든 속으로 ‘여성이니까 더 잘하겠지’라고 기대한 국민이 많았다. 그런데 ‘여성이니 더 잘할 것’이란 믿음은 근거가 있는 걸까. 세계의 여성 지도자 중에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처럼 성공한 이도 있으나 브라질 전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태국 전 총리 잉락 친나왓 같이 실패한 이도 얼마든지 있다. “여성이니까 더 잘하겠지”라는 선입관은 “여성은 무조건 안 돼”라는 편견만큼이나 위험하고 성차별적인 것 아닐까.

지난 정부의 실패는 국민과 공조직은 외면한 채 비선 측근하고만 소통한 대통령 한 사람의 실패일 뿐 결코 여성의 실패가 아니다. 여성 지도자 전체를 싸잡아 폄훼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가당치 않다. 물론 여자 대통령도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확률은 남자 대통령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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