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한민국은 그 어디에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

우리 헌법은 인간은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규정하지만 정작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적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다. 아무리 휼륭한 정신이 헌법에 선언되고 규정된들 전혀 존중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쇼(show)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몇년 전 우리는 마이클 샌델에게 열광을 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의 명성과 우리의 허영에 집착을 한 것 같다. 그의 메시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계량될 수 없다. 돈과는 더욱 더 그러하다.

3년 전 발생한 세월호 참극은 차치하고, 얼마 전, 철거하던 건물이 붕괴하면서 작업 인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우리가 인간의 존엄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지 말해 준다. 돈을 이유로 기본적인 안전조치를 소홀히 한 것이 건물붕괴의 원인이라고 한다. 세월호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진상규명을 위해 몇 천억을 쏟아 부어도 얻는 교훈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할 국회와 정부, 법원 그리고 법률가에게도 인간의 존엄성은 고려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헌법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지만 그 바탕을 이루는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지식은 영혼이 없는 인공지능보다 나을게 무엇인가.

이제 곧 무더운 여름이 다가온다. 전기료 누진제를 완화하였다지만, 여전히 누진제 때문에 아우성일 것이다. 법원은 가정용 전력요금 누진제는 자원의 합리적 배분을 위해서 필요하고,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경우 선택적으로 전력요금을 감액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은 가정에서는 누진제로 인하여 전기절약을 강요당하고 있는 반면, 가게는 소위 개문냉방을 하여도 누진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가게와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은 돈 버는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므로 전력을 절약할 필요 없는 것일까. 장사해서, 공장을 가동해서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역설적으로 가정용 전력요금의 누진제는 강한 정당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진제에 정당성을 부여함에 있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고민해 봤을까. 사회적 배려를 하고 선택적으로 전력요금을 감액할 수 있으면 인간의 존엄성은 존중되는가? 전기를 낭비하더라도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니까 괜찮고, 돈 버는 것이 아니면 비싼 전기료 부과가 정당한 것일까? 그렇다면 산후조리원과 양로원을 서로 차별해도 되는 것인가? 돈 벌지 못하는 인간은 필요없고 아이들은 장래에 돈을 벌기 때문에 필요한 존재인가? 가정에서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위해 쾌적한 삶을 누리면 안 되는 것인가?

단순히 누진제만이 아니다. 엊그제 법원은 운전 중 휴대폰 통화로 인하여 9살 어린 생명을 앗아간 40대 운전자에게 가족과 합의한 것 등을 참작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였다 한다. 죽은 자와 합의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인간의 존엄성도 상속되고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지?

인간의 존엄성은 선택이나 배려가 아닌 필수이다. 전력요금 누진제의 정당성이 현대판 고려장에 대한 녹색 신호(the green light)가 될까 무섭다. 인간보다 돈이 우선되는 천박한 사회가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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