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다보니 범죄를 일상적으로 만난다. 어떤 범죄가 그 범죄자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사건도 종종 있지만, 우발적으로 일어난 그 짧은 범죄의 순간에 한 사람의 상처 받은 생이 오롯이 새겨져 있을 때도 있다.

얼마 전에 끝낸 탈북자 사건이 그랬다. 가족같이 지내던 같은 탈북자 친구와 공장 기숙사 2인 1실에 살았는데 사소한 일로 둘 사이에 갈등이 커졌다. 방에서 술을 마시던 그는 담배를 피우다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로 친구가 자고 있던 이불 모서리에 불을 붙였다. 현주건조물방화 미수에 살인 미수.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사건이라 피고인 신문사항을 준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아야 했다. 십대 때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넌 이야기며, 걸어서 라오스와 베트남 국경을 넘은 이야기, 미성년자가 문화가 전혀 다른 사회에서 혈혈단신 적응하는 이야기까지, 한두 시간 대화로는 그 삶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국참 기일 직전까지 접견하고 구치소에 있는 그를 대신해 직접 양형 서류를 떼와 기일 전날 밤 증거서류와 함께 그의 삶의 조각보를 하나둘 꿰맞추어 보았다. 그가 이불에 불을 붙이던 순간 느꼈을 극단적인 절망감과 외로움의 절규가 그제야 구체적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중대 범죄 사건만 그런 건 아니다. 사소한 접촉 사고로 상대방과 시비가 붙었다가 현장에 출동한 교통경찰에게 욕을 하고 경찰의 어깨와 가슴팍을 밀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된 할아버지의 사소한 사건도 그랬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건물을 가진, 한달에 수천만원의 임대료가 통장에 꽂히는 그(그런 사람도 국선변호인 선정청구를 하고 그 청구가 받아들여지니 그건 이상하긴 했다)에게 3대 독자인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군에 가서 전역을 18일 앞두고 사고로 죽었단다. 하나뿐인 자식 부검하는 거 다 보고 밤낮을 거꾸로 살다보니 아주 작은 일에도 흥분하면 순간적으로 앞뒤를 생각하지 못해 망쳐버린다고 했다. 남들 다 부러워하는, 요새말로 ‘창조주’ 위에 있다는 강남 ‘건물주’의 삶이 그토록 무미건조하고 견디기 어려운 것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사소한 범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탈북자나 강남 건물주 할아버지 사건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엔 삶을 이해할 시간도 없고, 사건이 많음을 핑계로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어쩌다 한번씩 본의 아니게, 상처 난 생의 한 가운데를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 직업의 본질이 깨달아질 때면, 사건 수임이나 사건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안락하고 편안한 이 직업이 너무나 두렵고도 떨린다. 그런 깨달음이 자주 오지 않는 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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