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기자로 8년째 일하고 있다. 학부 4년, 석사 2년 법학을 공부했고 사법시험 공부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으니 ‘비자격자’ 중에선 법조에 꽤 가까운 축에 속할 지도 모른다.

사법시험 수험생 시절 신림동 고시촌에는 독특한 분들도 있었다. 같은 건물에 살았던 한 40대 아저씨는 회사원 생활이 재미없어 시험 공부를 시작한 분이었다. 휴게실에 가면 항상 계셨는데, 종이 신문부터 TV뉴스는 물론 외신까지 모두 섭렵했다. 퀴즈 프로그램을 틀어놓으면 놀라울 정도로 정답을 잘 맞혔다. 나보다 몇살 위였던 형님 한분은 주식을 열심히 했다. 시험 준비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을 주식거래를 해서 마련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나보다 두살 어린 또 다른 친구 하나는 비교적 빨리 1차 시험에 합격한 뒤 공부 비법을 주위에 설파하고 다녔다. 잠을 잘 때도 강의 테잎을 틀어 귀에 꽂고 잤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험에 합격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굳이 그랬던 이유가 뭔가 싶기도 했지만, 누구에게 피해를 주거나 했던 건 아녔다.

기자가 되고 나서는 주로 안좋은 일을 겪은 분들을 보게 됐다. 회식자리에서 얼굴 캐리커쳐가 들어간 명함을 건넸던 한 검사장급 간부는 ‘주식 대박’을 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검찰 포토라인에서 기자들과 재회했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 우연히 동석했던 판사 한분은 말수가 적은 분이었는데, 필력이 좋아 감탄한 적이 있다. 그분은 퇴직한 뒤 50억원의 수임료를 받았다가 법정에 섰다. ‘조만간 밥 한번 먹자’고 기약없는 말을 했던 부장검사 한분은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적지 않은 규모의 돈과 향응을 제공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을 지낸 신재민은 기자 출신이라 기억에 남는다. 2011년 수뢰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면서 “여기 출입하면서 취재를 했는데, 조사를 받으러 올 줄은 몰랐다”는 말을 남겼다.

아마 출발은 다 비슷하지 않았을까. 때론 큰 돈을 만지는 모습도, 이름을 남기는 상상도 떠올렸을 것이다. 나에게 “공부해라”는 흔한 말, 잔소리 한번 하신 적이 없던 어머니는 “너무 욕심 부리다가 상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고시공부를 그만뒀을 때는 “이제 마음 편히 명절 때 와서 밥먹고 갈 수 있겠다”면서 오히려 안도하셨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알 수 없다. 그 중에는 법조인이 된 분도, 아닌 분도 있을 것이다. ‘신 포도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허황된 꿈을 좇다가 난처한 상황에 놓이는 것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어딘가에서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고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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