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법률가요, 정치인이요, 학자였던 황성수(黃聖秀,1917~1997년) 박사의 탄생 100주년이다. 법률가로서 변호사와 한국법학원장, 정치인으로 국회 부의장까지 지내셨으며, 학자와 목사로서 다면적 활동을 하신 큰 어른이셨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만년에는 미국에 살다 작고하여 거의 잊힌 인물이 되었다. 한국 법조사와 지성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고, 나도 몇 가지 추억을 안고 있어 회상의 붓을 들었다.

그는 1917년 2월 22일 전남 보성에서 목사 황보익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4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수학하고, 1940년 동북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동경제대 대학원에서 연구했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정치학부에서 국제법과 외교학을 공부했는데, 여기서 켈젠(Hans Kelsen)의 제자가 됐다. 그때 쓴 ‘국제법상의 집단적 방위’라는 논문을 후일 ‘외무월보(1949년 12월호)’에 싣기도 했다. 당시로는 드문 국제적 지식인으로 1942년 미국 사법성과 전시정보국에 근무했고, 미군정 시기에 귀국, 1946년 미군정청 법무국 고문관을 지냈다.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같은 해 대한민국 외무부 초대 정보국장 겸 법무부 법무관을 역임했다.

▲ 황성수 박사

1950년부터 2·3·4·5대 민의원을 지냈다. 전쟁 중에는 기독청년동지회를 조직했고, 전국기독청년면려회 지도자로 청년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1950년부터 1956년까지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했고, 1956년에는 민의원 부의장이 됐다. 그러나 이른바 국제시계밀수사건의 주범과 연루됐다는 혐의로 사임했다. 한편 유엔총회 한국대표를 맡기도 하였고, 서울법대와 연희대 정법대에서 강의도 했다.

당시의 한 문헌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는 해맑은 얼굴에 예지가 횡일(橫溢)하고 빛나는 눈 속에 지성이 반짝이며 부드러운 성음(聲音)이 매혹적이라 온순하고 얌전하여 정적(政敵)이 없는 탓으로 35세에 무난히 국회 외무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위원장이 되기 전이나 된 후에나 한결같이 겸허했고 성실했다. 그는 말한다. 성실은 최선의 정책이라고(김종범 편저, ‘제2대 민의원 업적과 인물고‘ , 1954, 30쪽)”. 사람들은 그를 “청산유수의 달변”이라고 평했다.

1959년 6월부터 8월까지 전남 도지사를, 1960년에는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자유당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알려졌지만 이때부터 정계에서 멀어지고 법조계와 학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법학원에서 발간하는 ‘저스티스 제2호(1958)’에 ‘신민법제정의 의의’란 논문을 실었고, 제5호(1959)에는 ‘주권과 국제연합’을 게재했다. 1964년 명지대학교 정경학부 교수로 되어 숭실대학교, 총회신학교, 단국대학교에서 조직신학, 변증학, 기독교윤리학을 강의했다. 1967년부터 서울지방변호사회 부회장을 지냈고, 동시에 1972년까지 한국법학원 원장으로 한국영문법전 편찬에 기여했다. 1970년에는 기독교실업인회 회장직도 맡았다. 1969년 우석대학교에서 ‘한미행정협정연구’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 충현장로교회 원로목사에 선임되어 활동하다 1997년 3월 5일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부인 김계화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황규명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부친의 뒤를 이어 재미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옛 세계관과 새 세계관(1954)’, ‘황성수 논설집(1955)’, ‘교회와 국가(1972)’, ‘조직신학시리즈 전4권(1995)’ 등이 있다. 취미는 음악이었다.

나는 황성수 박사를 1980년대 초 대한문 옆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여러 차례 만났다. 그때 나는 한국에 온 서양인 법률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고, 특히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년)의 주한 활동을 추적하고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시절부터 영어를 잘 하기로 소문난 황 변호사는 프랭켈과 친밀한 교분을 갖고있었다. 아마도 위의 이력에 적힌 서울법대 강의는 프랭켈의 ‘국제사법’ 강의의 통역 겸 공동강의가 아니었나 추측된다(그렇게 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황 변호사는 자상한 증언을 해주셨고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녹음이라도 해두지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황성수 변호사는 누가 보아도 눈이 끌리는 미남 신사형으로 말씀도 조리있게 하시고 정담과 유머도 많으셨다. 워렌(Earl Warren) 미국 연방법원장의 방한 시 대법원에서의 강연을 능숙히 통역하시는 모습도 봤고, 그의 아들과는 법대를 같이 다녔다. 그 후 세월 탓인지 공간 탓인지 30여년을 소식도 모르고 지내다 우연히 최근 서울대 도서관에서 그의 저서들을 보고 100주년이 된 줄 알았다. 우리가 아무리 시공간의 제약 속에 살더라도 역사 속에 뜻있는 삶을 살다 간 선배 법조인들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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