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간다. 고통과 굴종의 길이다. 그 아픔을 이해하고 끌어안아줄 때 초월의 미덕을 약간 씹을 수 있다.

청변(청년변호사)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하늘에까지 닿아 퍼졌다. 낫살이나 먹은 법조선배로서 그들의 불우함을 돌아본다. 그들의 헤아릴 길 없는 좌절과 표류를 어느 소설가의 묘사로 대신 그리고 싶다. “거기에서 시간은 발생 이전의 습기로 엉겨있었고 진행의 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안개로 풀어져서 허공에 밀려다녔다. 그 뿌연 시간의 안개가 갈라지는 틈새로 물이랑 저편의 세상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김훈의 ‘공터에서’).” 소위 ‘청변의 참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의 핵심은, 법적 분쟁에 관여하고 해결하는 공적 권위를 가진 자라는 정체성을 상실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법 전문가로서 가지는 자부심은 휘발되어버리고,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일상은 너무 버겁다.

왜 이 같은 일이 생겼을까? 김영삼 정부가 1993년에 사법개혁을 국정의 최일선 아젠다로 내세운 이래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현재 사법제도의 수정된 골간을 세울 때까지 사법개혁은 15년의 대장정을 거쳤다. 과거의 법조인들이 과점적 지대의 수탈에 몰두하고, 민주사회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는 등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비판이 사법개혁의 큰 동인(動因)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아 한 이들은, 소수의 법조인이 야기하는 폐해를 가장 잘 인식하고, 또 그들이 누리는 과도한 사회적 지위의 허구성을 잘 아는 일부 법학교수들이었다. 그들은 법조계를 압박하며 로스쿨 제도를 쟁취했고, 그 후 전투적 이론교수가 되어 로스쿨 제도를 극력 옹호하며, 그들의 구미에 맞춘 한국 특유의 비뚤어진 로스쿨로 변형시켰다.

그들은 흔히 변호사자격을 가진 사람이 택시운전기사도 해야 제대로 된 사회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황금 같은 시기에 다시 비싼 등록금을 치르며 3년의 학업과정을 거쳐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이들에게 이 사회가 공정한 몫으로 무엇을 주어야 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경쟁사회의 장점을 들며 궤변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면 좋다. 왜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경쟁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가. 로스쿨 입학면접장에서 시종일관 특정 지역민을 비하하며 응시생들의 동의를 강요한 교수, 지인의 아들을 위해 동료교수들에게 장황한 입학청탁을 하고 다닌 교수, 자신과의 친소관계를 학점부여의 중요요소로 반영하는 교수, 이런 교수들 단 한 사람에게라도 경쟁의 힘이 작용하였는가? 아니 이런 잘못된 현상에 대하여 비판의 소리 한번 낸 적이 있는가?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

그들이 갖는 기존 법조계에 대한 적개감과 분노는 조금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증폭되며 법치주의의 대들보인 법조의 틀을 기형화시켜버렸다. 그 해악은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무력한 청변들이 겪는 고통은 대부분 여기에 연유한다.

법조인에게 법조인의 떳떳한 몫을 주는 것이 옳다. 좀 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윤리적인 법조인 양성제도가 새로이 들어서야 한다. 청변들이 희망의 닻을 올리며 가슴 설레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간헐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성의 실현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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