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 변호사(사시 44회), 파란

▲ (좌)이원호 변호사 (우)새들을 태우고 바람이 난다

누군가는 이제 와서 다시 ‘노동의 새벽’을 읽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물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새벽은 아직도 흥건한 붉은 피를 흘리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저 과거 속으로 떠밀어 버린, 이원호가 이십대를 보냈던,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지금, 여기 도처에 여전한 것이다. 과거에 대한 애도의 완결이 불가능했다면 그 이유는 타의에서든 자의에서든 성급하게 그 시절을 닫아 버려서가 아니라 아직도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원호가 첫 시에서 발견한 ‘화두’는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떠나보냈지만 결코 떠나보낼 수 없는 그 무엇, 떠난 듯하지만 실은 여전히 떠나지 않은 그 무엇, 이곳에 현재로 지속하는 과거,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 말이다. 그것은 멈추지 않는 애도다. 애도는 멈추어서는 안 된다. 애도가 멈추는 순간 삶도 시도 불가능해진다. 과거가 삭제된 현재는 자폐에 지나지 않으며 그때 언어는 그저 독백에 불과하다. 애도는 윤리이자 미학이다(채상우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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