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눈을 마주쳤든 서로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든 간에, 거실과 학교에서, 농장과 공장 바닥, 식당과 먼 군사 기지에서 제가 미국인 여러분들과 나눈 대화는 저를 정직하게 했고, 영감을 줬으며, 나를 계속 지켜줬습니다. 매일, 저는 여러분으로부터 배웁니다. 여러분이 저를 더 나은 대통령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한 시카고 고별 연설 중 저 대목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용 자체로도 멋지지만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이 그 연설에 겹쳐지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직업적 삶에서도, 친구나 가족과의 친밀한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음을 오바마의 연설은 확인해준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가 일방적으로 내려다보고 상대는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는 관계라면 그 사람은 그 직업이 줄 수 있는 성장의 기회를 걷어차 버린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국선전담변호인이라는 직업적 삶은 어떤가 생각해 본다. 겉으로 보기에 국선변호인과 피고인의 관계는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다. 우리는 도움을 주는 존재, 피고인은 도움을 받는 존재. 그 반대는 상상하기 어렵다. 더구나 우리가 변호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파렴치한이거나 삶에 책임감이 없다. 우리가 상대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상대도 우리를 선택할 수 없으니 우리의 만남은 그저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형 복역과 출소를 무슨 ‘라이프 사이클’처럼 반복하는 전과 수십범은 예외이긴 하지만 대체로는 사건이 끝나면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다. 살면서 결코 알고 지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소통하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가능할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려다보기’만을 당연시했다. 그럼에도 피고인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나를 변호사로, 한 인간으로 좀 더 성숙하게 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법률이 헌법 정신이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사람은 고매하신 헌법 교수님이 아니라 문이 잠겨있지 않은 차를 골라 차 안에서 동전을 훔쳐가던 30대 상습절도범이었고, 인간은 왜 존엄한지를 가슴으로 깨닫게 해 준 사람은 영혼까지 아름다운 성인(聖人)이 아니라 갑자기 성기를 꺼내 깜짝 놀라는 여자를 보며 성적 쾌감을 느끼는, 공연음란 전과만 수십번을 반복하는 ‘바바리맨’이었다. 이런 자리에 글을 쓰며 나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국선변호인이라는 특권으로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고마움을 표시해야겠다 싶다. 나를 더 나은 변호사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그들이 이 글을 볼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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