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여니 철학자 김형석 선생의 인터뷰 기사가 산뜻하게 실렸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세분을 들었다. 안창호, 유일한, 김성수 세분이다. 그들 모두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는 말에 가슴이 너그러이 가라앉는다. 삶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세지는 요즈음 큰 위안을 주는 말이다. 그래도 내게 얄팍하나마 신앙이 있기에 그리고 신앙이 생의 보다 많은 부분을 감싸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들은 법조인이라면 큰 영화를 누리는 듯이 보기도 한다. 하지만 판사나 검사로서 남을 판단한다는 일이 때때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층층시하의 그 삼엄한 조직체계가 안겨주는 숨막힘은 또 얼마나 큰 것인가. 한편 당사자에게는 일생을 좌우할 큰 문제라도 내 앞에서는 단지 일상의 잡무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황량한가. 변호사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의뢰인을 대할 때 적지 않은 경우 그의 얼굴 옆에 지폐를 나란히 하지 않고서는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직원들에게 봉급을 주고, 가족들 벌린 입을 생각하는 한 이것은 변호사의 숙명이다. 억지를 부리는 악성의뢰인을 만나면 속수무책이다. 이러려고 내가 변호사를 했나 하는 탄식이 한번씩 입에서 새어나온다.

그러니 법조라는 삶의 개펄에도 존재의 우수가 두텁게 깔려있다. 이 개펄에 발을 내려 짙은 우수를 몸에 바르며 우리 모두는 하나의 허약한 존재, 바스라지기 쉬운 존재임을 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법조인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별을 가슴에 안고 하늘로 날아올라가기를 갈망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종교적 행위를 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양 복심법원 판사를 하다 사형선고에 환멸을 느끼고 수행의 길로 들어선 효봉 스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성스런 구도의 길을 걸은 김홍섭 판사 등등 신앙의 면에서 후배 법조인의 귀감이 되는 선배들이 적지 않게 계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안타까움에 절어 던지는 의문이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인가.

잘은 모르지만 희미한 인식에 기초해서 가느다랗게 말을 뿌려내자면 이렇다. 아마 적신(赤身)으로 부처님이나 신과 마주치는 격렬하고 절실한 경험을 가진 연후에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외적이고 초탈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우리가 심히 곤경에 처했을 때 부처님, 하느님 혹은 하나님과 마주하겠다고 마지막 힘을 내어 용약하면 그것은 의외로 쉽게 찾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 대면의 예를 무진기행을 쓴 천재소설가 김승옥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그는 처참한 5·18 후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으로, 그 하얀 내리닫이 옷을 입으신 하얀 몸-하얀 머리칼, 하얀 수염, 하얀 피부의 얼굴 등, 하얀 모습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눈으로 보게 되는 등, 극치의 구원이 나에게 임하신 것이다”라고 토로하였다. 이런 극한적 체험은 사실 드물다. 여하튼 그는 삶의 전환에 몸을 떨며 소설을 절필하기까지 한다. 그의 전부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받아들인 신의 은총인 셈이다.

개펄에서 머리를 위로 돌려 하늘로 올라가려할 때 법조인생은 색깔을 바꾼다. 찬란한 영성의 빛이 일상의 칙칙함을 덮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함께 노력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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