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 1625년 왕위에 오른 찰스 1세(Charles I)는 왕권 강화를 주장하며 줄곧 영국 의회와 마찰을 빚었다. 마침내 1642년 내전이 발발했다. 전쟁에 패한 그는 의회군에 체포되었다. 1649년 1월 4일 평의회는 국왕을 반역죄로 기소했다. 초유의 사건인지라 근거가 문제였다. 보통법원의 대법관들은 기소가 불법이라 선언했다. 평의회는 국왕을 재판할 특별법원을 구성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이 ‘왕의 제가(Royal Assent)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자, 평의회는 ‘이 법안은 제가가 필요 없는 법’이라고 선언했다.

특별법원은 135명의 위원(commissioner)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대부분이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68명이 재판을 맡았다. 국왕은 공소 내용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채 “무슨 권한과 근거로 나를 이 법정에 세우는지 알고 싶다(I would know by what power I am called hither, by what lawful authority…?)”라고 주장했다.

특별법원은 피고인을 재판에서 배제한 채 증인 30명의 일방적인 증언을 들었다. 1월 26일 국왕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다음날 위원회는 국왕을 출석시킨 뒤 사형을 선고하였다. 총 59명의 위원이 사형 집행문에 서명하였다. 그는 1월 30일 참수되었다. 의회파는 기세를 몰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Common wealth of England)을 세웠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독재자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사망하자, 1660년 왕정으로 복귀했다.

찰스 2세(Charles II)는 선왕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사형 집행문에 서명한 59명의 위원들의 이름을 리스트에 올려 놓고 ‘국왕 살해(regicide)‘ 혐의로 처벌을 시작했다. 13명이 사형을 당했고, 25명이 종신형에 처해졌다.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른바 ‘블랙리스트(blacklist)’의 시작이었다. 블랙리스트는 20세기 들어서도 맹위를 떨쳤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의 SS는 영국을 정복한 뒤 수용소로 보낼 2820명에 달하는 인사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윌리암스(Ted Williams)와 같은 극작가 등 예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블랙 북(Black Book)’이라고 부른다.

냉전 시대가 엄습하자 미국에 메카시즘 광풍이 불었다. 미 의회 반미활동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 tee)는 1947년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연예산업 종사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취업을 제한할 목적으로 리스트가 작성되었다. ‘헐리우드 블랙리스트(Hollywood Blacklist)’다. 놀랍게도 리스트는 1960년대초까지 활용되었다. 인권종주국이라 자처하던 미국에서 자행된 흑역사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교육계에도 유사한 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다. 그 규모가 방대하여 리스트에 끼지 못한 인물들이 섭섭해 할 정도란다. 특별한 이념이나 정치색을 띤 것도 아니고 단지 야당 정치인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든지, 세월호 진상 규명에 동참했다든지,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고 한다. 이 치졸하고 유치한 일에 청와대가 나서고 국정원이 동원되었다니 기가 찰 따름이다.

놀라운 것은 이를 지시하고 실행한 최고 핵심들 모두가 법률 전문가였다는 사실이다. 무슨 이유로 헌법의 금과옥조인 인권 보장을 내팽겨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법 살해’를 당한 선왕을 위해 원조 블랙리스트를 만든 중세의 왕이 웃을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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