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건을 끝내고 변호인석에서 나오는데 재판장이 호명한 다음 사건 피고인 이름이 익숙했다. 혹시나 싶어 확인하려고 방청석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때 내 피고인이었던 그가 구속 피고인 대기석에서 나왔다. 무전취식 사기 수십번의 전과자. ‘딱 한잔만’ 하며 술을 마시다 어느 순간 술이 자신을 완전히 마셔버려 10년도 넘는 세월동안 교도소를 내 집 드나들 듯이 하던 사람.

2년 전, 결코 다시는 구치소에 들어오는 일이 없을 거라고 국선변호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다짐했던 그 사람이 다시 수의(囚衣)를 입은 채 피고인석에 서 있다. 그 옆에 앉은 국선변호인은 한때 내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니 피해자와 합의할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무전취식 사기범은 국선변호인의 단골 고객이다. 하도 많은 무전취식 사기범을 만나서 이제는 금방 진행한 사건의 피고인 이름도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왜 생생히 기억이 나느냐 하면 그 사건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갓 변호사 등록을 마친 국선전담변호사 1년차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름, 죄명 등 사건 내용뿐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내력도 꿰었다. 수사기록을 가슴으로 읽었고, 수사기록 행간 곳곳에 숨겨진 삶의 이야기도 끄집어내어 서면을 쓰던 시절이었다.

그건 2년 전 이야기다. 이제 수사기록은 눈으로 읽기에도 벅찬 서류‘뭉치’가 되었다. 양형부당 주장의 항소심 사건 수사기록은 펴보지도 않은 채 파쇄기에 던져지는 신세가 될 때도 있다. 수사기록의 용도는, 부인하는 사건에서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실을 찾고 인정하는 사건에서는 양형 변론에 쓸 만한 진술 몇개를 건지는 것에 불과했다.

옛 피고인을 방청석에서 바라보던 그날 저녁, 젊고 유망했던 신경외과 의사가 서른여섯의 삶을 마감하며 쓴 책 ‘숨결이 바람될 때’에서 한 문장이 내 가슴에 와 꽂혔다.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의사는 당시 처음으로 환자를 잃었다. 칼날같이 서슬 퍼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환자를 서류같이 대하는 매너리즘이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그 의사는 의사들이 다루는 온갖 서류들이 ‘그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위험과 승리로 가득한 이야기들의 조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깨달음이 암에 자신을 내어줄 때까지 마지막 환자 한 명까지도 무미건조한 서류로 대하지 않았던 삶의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수사기록을 펴 든다. 의사의 그 문장이 나를 추스르게 했다. 모든 수사기록을 가슴으로 읽지는 못해도 종결되어야 할 사건의 종이뭉치로 대하는 것에 그치지는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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