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기자라고 알리지 않는다. 기자와 마주하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실 기자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친척 가운데 하나 정도 있으면 좋은 그런 존재다. 그마저 부정청탁금지법 때문에 옛날 일이 됐지만. 하지만 나도 신문사에 막 들어간 무렵에는 기자임을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치졸한 바람이 뜻하지 않게 이뤄진 것은 “직업병이냐”라는 말을 들을 때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왜 이렇게 꼬치꼬치 묻느냐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질문하는 기계가 돼 있었다. 하지만 내심 뿌듯했다.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검찰 출입기자들이 만날 하는 이 질문이 내게는 너무나 어색했다. 이 사람은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억대 수임료를 주고 대형 로펌을 선임했다. 며칠에 걸쳐 연습을 마치고 입을 맞추고 나왔다. 그런데 처음 만난 기자에게 혐의를 인정할까. 얘들은 대답을 바라기는 하면서 이런 질문을 할까. 도대체 어디에서 배웠을까. 법조기자가 나오는 영화에서 본 듯도 한데, 영화가 먼저인지 현실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2006년 11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조사를 받고 나오는 하종선 현대해상화재보험 대표에게 달리 물었다. “많이 억울하시죠?” 변호사인 하 대표도 주변의 기자들도 움찔했다. 나는 한동안 친재벌 기자로 불렸다.

기자스럽다는 말이 칭찬이 아닌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사생활에서의 내 언동을 찬찬히 살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조차 한 가지 사안을 거듭해서 묻는 버릇이 있었다. 답변이 명쾌하지 않으면 질문의 폭을 좁히고 설득력이 없다 싶으면 이유를 대게 했다. 수학과를 졸업한 변호사의 이력이 특이하다며 성장과정을 캐묻는 식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한 것은 질문이 미진해서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답하기 싫은 이야기를 배려 없이 물었기 때문이다. 변명하자면 나는 질문하도록 훈련받고 요구받았다. 질문하지 않는 기자는 존재가치가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모자란 내가 직업적 습관을 사적 영역까지 가져온 것이다. 기자병이고 가엾은 노동재해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아이들이 질문이 많아지는 것은 천재성의 발현이 아니라 애정결핍의 한 증상이라고 한다. 지난주 박근혜-최순실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가 끝났다. 어떤 조사위원은 반말로 질문을 하거나, 가족을 들먹여 인신공격을 했다. 답변을 가로막고 무작정 사과를 요구한 경우도 수두룩했다. 아무리 봐도 답변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미꾸라지를 잡은 사이다로 불리며 인터넷에서 스타가 됐다고 한다. 모든 질문의 목적이 답변이 아니라는 걸 질문병에 걸린 나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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