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평가제를 그만 두면 홍 변호사와 같은 젊은 변호사들이 계속 판사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일 지금 법관평가제를 시작하여 변호사들에게 유용한 제도로 정착된다면 내가 받을 불이익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호사회장은 이런 일을 하라고 선출된 것 아닌가. 공정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법관평가제를 시행하는 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었다.

200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오전 10시경 서울회 황용환 사무총장, 김종철 법제이사와 함께 서울중앙지방법원 기자실에 들어섰다. 미리 준비한 요약자료를 꺼내 오늘부터 법관평가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2008년 재판을 경험한 서울회 소속 변호사들이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 등 서울지역의 재판담당 법관 약 700명을 대상으로 이날부터 2009년 1월 17일까지 25일간 법관평가제를 진행한다고 공표했다. 언론은 “법관도 평가 받는다”고 보도했다. 이때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법관평가의 핵심이 되는 법관평가표도 공개했다. 평가표에는 ▲판사의 태도와 말씨, 친절도 등 자질 및 품위 ▲재판의 공정성 ▲사건처리 태도 등 3개 항목을 평가항목으로 삼았고, 각 항목마다 구체적 평가기준을 만들어 모두 17개 평가기준을 예시했다. 구체적 사례를 적는 난도 따로 만들었다.

이날 연합뉴스는 “그동안 불가침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던 판사의 재판 진행에 대해 적절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고 법관평가제로 사법신뢰 회복의 기초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사건 당사자를 대리하는 변호사들이 담당 판사를 평가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우려도 공존하는 상황”이라며 “서울지역 법원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법관 평가의 필요성에는 공감할 수 있겠지만 변호사들이 평가한다는 게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변호사의 법관평가가 소신 있는 재판 진행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재판의 독립성 침해라는 부작용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고 법원의 반발을 전했다.

서울회 회원들에게는 “사법사상 최초로 ‘법관평가제’를 시행하면서”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냈다.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저는 20여년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판사가 변호사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해도 변호사들이 말 한마디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것은 사법의 민주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품위 없는 재판, 불공정한 재판이 방치되어 왔던 것은 법관의 독립이라는 명분 앞에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압적 자세로 인격을 모독하는 재판, 자의적으로 전횡하는 불공정한 재판은 법관의 독립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한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성적을 중심으로 법관을 서열화하여 승진을 결정하는 현재의 사법시스템은 법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재판을 주재하는 재판관으로서의 자질과 품위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신뢰받는 사법부는 사건당사자는 물론 대리인으로부터도 존중받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저는 ‘법관평가제’를 2년간 준비해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시행하면서 이 제도야말로 우리의 사법부를 국민을 위한 열린 사법부로 만들고, 우리의 재판을 품위 있고 공정한 재판으로 만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이 제도의 성공은 회원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며 법관평가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2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시행하게 된 것은 나를 포함한 집행부 임기가 2009년 1월 28일 끝나기 때문이었다. 일정이 촉박하여 1월 셋째주 토요일인 1월 17일까지 평가표를 받아 결과를 분석하여 그 다음주 결과를 발표해야 했다.

법관평가제 시행을 발표하자 2008년 12월 말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시법원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한국인 채동배 판사가 ‘한국에서의 법관평가제도 추진에 관하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변호사들에 의한 법관평가제도는 오히려 만시지탄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변호사의 언론의 자유, 국민들의 정보접근이라는 의미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 곳 텍사스 주에서는 변호사회에 따라 대개 카운티별로 1년에 한번 혹은 두번씩 법관평가할 기회를 갖고 그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라며 현직 검사도 변호사의 자격으로 법관평가제도에 참가하고 있는 사실을 알려왔다. 법관평가가 언론을 통해 해외에도 알려진 것을 알았다.

2009년 1월 1일 매일신문에 게재된 ‘법관의 권위’라는 제목의 ‘복거일의 시사코멘트’는 법관평가제에 관한 글로는 압권이었다. “‘유전무죄’라는 냉소적 속언이 가리키듯, 우리 시민들의 사법적 정의에 대한 회의는 크다. 특히 ‘전관예우’라는 부패가 널리 퍼져서, 이는 사법적 정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법관평가제는 이런 사법적 부패를 어느 정도 걷어낼 것이다. 사법부는 이런 움직임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런 반성이 없으면 너무 낮아진 법관의 권위를 높일 길이 없다.”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논리 앞에 법관평가제는 돛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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