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아래층에 여러 가지 숨겨진 밑그림이 존재하며….”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검찰의 수사결과는 국정농단 사태의 한가운데서도 비중 있는 뉴스였다. 천 화백 본인이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며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 했지만, 그림의 제작 방식과 이동 경로를 종합한 검찰의 결론은 천 화백의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위작자를 자처하던 이도 그림을 보여주자 “흉내낼 수 없다”고 실토했다는 뒷 이야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유족들이 반발한 것 역시 이야깃거리다. 아직도 강력한 근거 중 하나는 원작자의 부인이다.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 없다”는 천 화백의 생전 발언을 다시 읽노라니 엉뚱하게 떠오른 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좌파 색출, 검사 블랙리스트, 대법원장 사찰…. 지금 사람들도 김 전 실장이 21세기의 도화지에 유신시대의 큰그림을 그렸다고 의심한다. 업무일지에 이름이 있고 모두가 원작자로 지목한 이는 한사코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한다.

원작자가 부인하는 그림의 주인찾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초원복집 사건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거쳐 결국 무죄가 된 일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런 발언을 한 이가 우리 사회에서 승승장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하던 법관을 본 일이 있다. 고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김 전 실장에게 10만 달러를 전달했다는 녹취가 공개됐지만 그가 어떤 조치를 받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법률 미꾸라지’라는 힐난이 괜히 생긴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림이면 그림이지 원작자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근원적인 물음도 있다.

롤랑 도르줄레스라는 프랑스 작가는 당나귀 꼬리에 물감을 묻힌 뒤 캔버스를 갖다 댔다. 파격주의라는 선언문을 곁들여 자신의 예명으로 출품하자 평단은 새로운 사조를 극찬했다. 다음날 한 신문에는 “당나귀가 새 사조의 지도자”라는 기고가 실린다. 애초부터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을 골탕 먹이려던 도르줄레스의 장난이었다. 장막 뒤에서 이건 정말 예술적이라며 낄낄댔을 국정농단의 설계자들이 연상된다.

사실 내가 안 그렸다 하지만 당나귀에게 죄를 씌울 수는 없는 노릇이며, 특검은 ‘압인선’의 흔적을 쫓고 있다. 생각해보면 미인도의 진품 논란은 적어도 압인선이란 말을 배울 기회를 줬다.

국정농단 밑그림의 주인 찾기도 온갖 상식을 제공하지만, 수업료를 제하고도 모두의 비용이 크다. 그 밑그림은 국민연금을 부어온 생활인들, 정당히 경쟁하던 기업인과 예술인들, 공정한 대학입시를 믿어온 청소년들의 삶을 통째로 크레용 삼았다. 아무나 위작할 수 없는 솜씨로 봐야 옳을 것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