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최부자집이 있다. 9대 진사에 만석꾼의 재산을 유지했다는 것보다, 적선의 공덕을 쌓으며 사회적 책임을 다했다는 가문이다. 이 가문에 속한 어느 80대 노인이 자탄하며 한 말이다. “나는 내 평생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단 한번도 본 일이 없소.”

요즘 들어 부쩍 최 노인의 탄식이 귀를 적시는 것을 자주 느낀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세간의 상투어와 달리, 정의는 저 멀리에만 있는 것인가. 우리 법조를 떠받치는 큰 기둥인 로스쿨을 들여다 볼 때도 문득문득 이 의문에 사로잡힌다.

왜 로스쿨 제도를 도입하면서 우리가 대륙법체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단 한번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그 많았던 세미나, 공청회 등 어디를 봐도 고려의 흔적이 전혀 없다. 당연히 우리와 같은 대륙법체계에 속하는 나라인 독일,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보다 먼저 로스쿨을 도입했다고 하는 일본의 운영예도 거의 참고로 하지 않았다. 일본의 로스쿨이 실패로 끝났다고 하며 폄하하는 견해가 없지는 않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처럼 극심한 모순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대륙법계 국가임을 고려하여 변형된 로스쿨제를 취했고, 또 우리와 달리 일본 정책당국의 세심한 배려를 받으며 그럭저럭 괜찮게 굴러가고 있다. 당연히 그곳에서는 로스쿨을 근간으로 한 법조양성제도에 관해 비판적 여론이 우리만큼 심각하지 않다.

3년의 기간에 기본적으로 법학부 출신이 아닌 학생을 로스쿨에서 받아 이론교육과 실무교육을 충실히 시킬 수 있다는 이 황당한 발상은 과연 처음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가? 국가의 정책이 이처럼 비전문적이고, 즉흥적이고, 무모한 발생에 토대했을 때 거기에서 생기는 파괴적 결과의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제대로 된 나라이다.

로스쿨 제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쩌면 대다수의 로스쿨 학생들이다. 그들은 3년의 수업기간 내내 가늠하기도 힘든 엄청난 학습량에 시달리고, 우왕좌왕하며 불안과 초조로 가득 찬 회색의 공간에 학창생활을 밀어넣는다. 법철학, 국제법과 같은 기본과목의 몰락은 어쩌면 작은 문제이다. 로스쿨 출신자에 대한 편견, 사회적 사다리의 소실을 생기게 했다는 비난 등등 국민의 차가운 시선이 더욱 아프다.

그런데 엉뚱한 문제가 빚어져 나왔다. 로스쿨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로스쿨 학생, 로스쿨 출신 법조인, 그리고 로스쿨 교수 집단이 강력한 철의 삼각동맹을 맺었다. 로스쿨에 대한 비판을 누가 조금이라도 꺼내면 그것을 로스쿨제도에 대한 손상으로 등식화시킨 뒤 무자비한 폭격을 서슴지 않는다. 그 폭격에는 손톱만큼의 논리도 이성도 양식도 없다. 이것이 지금 한국의 단일한 법조양성제도인 로스쿨의 구겨진 자화상이다.

“이게 나라냐?”하는 분노가 2016년의 한국사회를 달구었다. 한숨과 탄식, 자조가 거대한 촛불집회를 거치며 승화의 불길로 솟아올랐다. 사회변혁의 불길이 이제 로스쿨 제도에도 올라앉을 때가 되었다. 현재의 로스쿨은 그 수명을 다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국민들의 로스쿨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은폐와 호도로 여론의 방향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로스쿨이 피닉스처럼 활활 타올라 죽은 뒤 법조양성제도가 새롭게 탄생할 때 비로소 정의의 꽃이 한 송이 찬란하게 피어난다. 그냥 꽃이 아니라 끈질긴 생명력을 갖춘 들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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