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우연히 몽환(夢幻)의 세계에 갇혀버린 주인공 ‘치히로’가 마녀 유바바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마녀 유바바는 타인의 정체성을 잃게 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지배하는데, 주인공에게도 앞으로 ‘치히로’라는 이름을 잊고 ‘센’으로 살아가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치히로는 꿋꿋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다가 결국 몽환의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는데 성공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변호사로서 갈등과 반목의 한가운데 서서 누군가의 권익을 대변하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때로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잊은 채 누군가의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에만 매몰되는 경험을 하는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변호사로서 사건에 몰입하다가 잠시 ‘나’를 잊게 된 것이 직업인으로서는 칭찬받을 일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사건’의 세계에 빠져버리는 우(愚)를 범할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모교 인근에는 ‘무진기행’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4000원짜리 나시고랭이 맛있어서 애용하였는데,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의 어느 봄날 선배노릇을 해보겠다며 신입생 두 명을 그곳에 데려가 나시고랭 한 그릇씩을 시켜준 후,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고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 이 나무젓가락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작은 물건에 불과할 수 있지만, 나무젓가락에 대한 추억이 있는 자에게는 추억의 한 조각이야. 먼 훗날 인생을 뒤돌아보았을 때 네 인생에 가치를 부여해줄 수 있는 원동력은 이러한 추억이니, 더 많이 더 적극적으로 추억을 쌓아라.”

사람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변호사 역시 변호사라는 직업 이전에 고유한 개성과 자아를 지닌 사람이므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었을 때에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훌륭한 변호사가 되는 것도 좋지만 ‘나’에게도 집중해보자. 정체성을 잃고 몽환의 세계에 갇힌 ‘센’이 되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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