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면 언론에서는 ‘올해의 인물’을 선정하곤 한다. 연말 아니면 못하는 일이니 따라해 보기로 했다.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며 만난 피고인 중 ‘올해의 피고인’을 뽑아 보기로. 이런 저런 후보감이 떠올랐지만 결론은 주저 없이 K였다.

이삼십대 젊은이 다섯이 임대료를 아끼느라 원룸에 같이 살았는데, 함께 살던 스무살 여자애가 자는 동안 가슴과 음부를 만졌다는 준강제추행 사건이었다.

K는 경찰에 임의 동행해 수사를 받으며 범죄 사실을 부인했고 곧바로 긴급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소년범 전력에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으로 징역 2년을 복역하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누범이니 구속될 만도 해 보였다.

K는 근 한달 동안이나 공소사실에 대한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진짜 억울해요.”, “억울해도 전과가 있는 제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요, 그냥 인정하고 선처를 바라는 게 좋겠죠?”, “그래도 아닌 건 아닌데….”

수사기록상으로는 무죄 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피고인이 하도 억울하다고 하니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진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K는 무죄 주장으로 방향을 정했다. 반전이 거듭된 증거 조사 과정 끝에서야 나도 그의 무죄를 확신하게 되었고, 선고도 예상대로 나왔다. 구속된 지 5개월 만에 그는 풀려났다.

왜 올해의 피고인인가. 극적인 무죄 사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종범죄 전력이 있는 자신이 공소사실을 인정하면 형을 조금 낮게 받을 수 있겠지만 부인하면 괘씸죄에 걸려 형이 높아질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계산을 하면서도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다투어 보겠다고 한 그 결정 때문이다.

무죄추정원칙은 그 번듯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동종범죄 누범인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다투다가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에는 누범 기간임에도 반성하지 않고 개전의 정이 없다는 부정적 양형 평가와 다르지 않은 게 현실 아닌가. 그 현실을 감수하기로 한 건 가히 ‘용기’라고 평가할 만 했다.

무죄가 확정되면 구금에 대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 항소심이 끝나 무죄가 확정되고도 넉달 동안이나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다른 범죄로 또 잡힌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 최근에야 K가 연락을 해 왔다. 출소 후 먹고 사느라 바빴단다.

형사보상청구서 써줄 테니 이번 주에 꼭 오라고 했다. 당장 써야 할 서면 밀린 게 줄줄이인데 끝난 사건 애프터서비스라니. 방법만 알려주고 직접 쓰라고 할걸 괜히 써준다고 했나 싶다가도 그 정도의 ‘예우’는 해줘도 되겠다 싶다. 내가 뽑은 올해의 피고인이니까.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