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동국 변호사님은 1998년 간암 발병 이후, 2번의 간 절제, 1번의 간 이식, 2번의 폐 절제, 1번의 늑골 절제 등 모두 6번의 큰 수술을 받고, 무려 12번의 색전술을 받았다. 그리고 암이 온몸에 퍼진 이후엔 4년간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2015년 겨울 이맘쯤, 중환자실 입원 전날까지도 의뢰인의 변호를 마치곤 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1993년 서울중앙지방법원 근무시절, 유독 ‘사람’에 관심이 많은 한 젊은 판사를 만났고, 2002년 같은 시기에 사표를 냈다. 물론 법원 근무시절에도 서로에게 좋은 친구였지만, 개업 이후에는 적지 않은 사건을 같이 변론했고, 자질구레한 일상사도, 변호사의 애로사항도 같이 의논했다. 실은 판사 재직 시절에도 서울과 전주에서 같이 근무했고, 특히나 형사 단독을 같이 하던 1997년 양형기준을 맞추어 사실상 합의제처럼 재판했다. 재야에서 공동으로 수행한 사건들도 의뢰인의 만족도나 사건의 결과가 비교적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김동국 변호사님을 ‘남자 베프’라 소개하곤 했다.

법조인의 모럴 헤저드가 연일 지면을 메우는 요즘,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늘 따뜻함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고 김동국 변호사님을 한번쯤 기리고 싶다. 김동국 변호사님은 한마디로 ‘사람’을 사랑했던 분이다. 그분은 무척 경이로운 삶을 살았다. 삶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고, 숨 쉴 힘조차 버겨울 때도 남을 도왔다. 그분은 늘 ‘사람’이 최우선이었다. 돈, 명예, 권력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허나 ‘사람’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알면서 속아주고, 일부러 손해보고,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굳이 잘못을 들추어내지도 않았다. 못 본척 덮어주고, 혹여 맘 다칠까 조심했다. 아마도 누군가의 기쁨에 같이 행복해 하고, 누군가의 괴로움에 홀로 눈물을 삭였을 게다. 피곤한 하루마다 고통은 얼마나 컸으랴. 그런데 도통 내색이 없었다. 한번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게 뭐 어떠냐?”고. “남들보다 많이 아프게 사는 거, 그리고 남들보다 일찍 죽는 거 나는 다 괜찮다!”고. 다만, 그 묵직한 고통을 이겨내느라 종종 뒷산을 거닐며 창조주에게 하소연한다 했다. 그 위로가 병든 육체를 지탱해 준다면서.

김동국 변호사님은 병든 육체를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늘 안쓰럽게 생각하고, 모든 걱정을 대신 끌어안았다. 특히나 학대나 곤고함 속에 있는 사람, 억울함을 마음에 품은 사람에겐 기꺼이 두 손을 내밀었다. 허구한 날 무료변론을 했으니 돈을 제대로 챙기진 못한 것 같다. 약정서 하나 야무지게 쓰는 걸 못 봤으니 말이다. 도대체 그 만신창이의 몸으로 변호사 업무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어찌 이겨낼 건지 늘 걱정이 앞선 우리에게, 김동국 변호사님은 ‘남을 돕는 게 삶의 추동력’이라 했다.

나는 김동국 변호사님과 같은 하늘에서 호흡하지 않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날엔, 혼자 중얼거린다. “의리 없게 혼자 좋은데 가구, 남은 사람들 어떡하라고”. 그러나 곧 깨닫는다. 그분이 뿌린 사랑의 씨앗이 이 사람 저 사람 그 무수한 만남 속에서 아름답게 자라나고 있다는 걸. 그렇다. 그분은 진정 사랑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분이었다. 김동국 변호사님! 아마 오늘도 창조주 품안에서 기도하고 계시겠지. 생전에도 그랬듯이 남은 사람들 걱정하면서 말이다.

나는 김동국 변호사님에 대한 추억을 윤동주의 시 한 구절로 표현하고 싶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부러워하기까지 한 이 구절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때로는 죽음이라는 극단에 이르기까지 이타적(利他的) 결단을 조용히 수용하는 고귀함에 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행복이라 했다. 그래! 김동국 변호사님은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사람’에 대한 사랑에 한없이 용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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