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비가 그치니 상인들도 즐거워했다. 종로4가부터 경복궁에 이르기까지 지하철역 좌판마다 활기가 돌았다. 생수, 과자는 물론 종류별로 내세운 휴대용 스마트폰 충전기와 이어폰들이 불티났다. ‘넘나 포근한 방석’은 USB가 연결돼 전열 효과도 있는 것이라는데, 1만1900원이라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사는 이가 꽤 있었다. ‘사진이 잘 나오는 셀카봉’이라고 상인이 외치자 ‘박근혜 퇴진’ 손피켓을 든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달려간다.

상인들에게 대목을 안겨준 인파는 밤이 이슥해지자 행진을 멈추곤 제가끔 원을 그려 발언을 이어갔다. “부끄럽다, 당장 내려오시라, 이것이 나라냐,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하는 말과 노래가 지난주와 다르지 않았건만 나는 여전히 어딘가 잘못한 느낌이 들어 발언자들의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진실’이며 ‘팩트’를 스스럼없이 말하면 나는 잡생각이 많았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조금은 어색한 느낌 때문에, 그리고 많은 부분은 부채의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명색이 저널리스트라면서도 이 사태에 바람직한 기여를 한 게 전혀 없었다. 구국의 영웅이 된 언론인들의 명단에는 당연히 내 자리가 없었고, 내자동 로터리에서 불러낸 Y마저 기억하는 내 기사 한줄이 없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오는 반가운 이들이 궁금해 한 건 비아그라나 굿판, 호스트바와 성형수술 따위였기에, 더더욱 아무런 말도 전해줄 수 없었다. 독자보다 나은 게 없고 독자만도 못한 기자로 살았던 주중의 시간들이 토요일 밤거리까지 늘어졌다.

“작년에 서명운동까지 받아 가며 말했던 것들이다. 그땐 아무도 기사를 안 썼다.”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압력을 행사하다 없애버렸다는 한 체육계 재단을 찾았더니 관계자가 점잖게 힐난했었다. 이제와 지연된 정의를 뒤적이는 꼴이 우습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관천 경정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2014년 검찰의 ‘정윤회 동향 문건’ 수사를 취재하면서 내가 자신했던 팩트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의 권력서열 발언이 재조명될 때 과연 나는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퇴진을 시사했고, 이젠 사회의 분야를 가리지 않고 국정농단에 대한 단죄가 한창이다. 공범을 지목하고 의혹을 논하는 언론 기사들이 앞장을 선다. 지나고 나면 모두가 현자라지만 내가 지금 누구더러 ‘짖지 않은 워치독’ 운운할 형편이 못 된다. 그 밤에 원을 그리고 선 이들은 세상 곳곳의 진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며 분노하고 있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고, 팩트라는 낱말은 외려 말하기 간지럽다고, 아직도 나는 옆에 선 Y에게만 들리게 불평하고 있었다. 절반쯤은 이 거리를, 내 곁을 맴돌았을 진실과 팩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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