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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기자실]종이의 노예, 노예의 종이
이경원 국민일보 기자  |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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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호] 승인 2016.11.07  10: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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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킨스가 ‘머큐리, 또는 신비롭고 신속한 사자’에서 전하는 일화로, 움베르토 에코의 책에 써 있다. 한 인디언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무화과 바구니와 편지를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노예는 가는 길에 배가 고팠는지 무화과를 몰래 먹고, 남은 몇알만 가져다 줬다. 아무도 못 봤다 생각하며 태연하게 바구니를 건넸는데, 받아든 이가 편지를 펼쳐 읽더니 별안간 노예를 나무랐다.

이 노예가 며칠 뒤 같은 심부름을 하게 된다. 이번에도 무화과에 손을 댔지만 방식은 조금 달랐다. 노예는 바구니에서 편지를 꺼내 큰 바위 아래에 숨긴 뒤 무화과를 훔쳐 먹었다. 지난번에 고자질을 한 주인공이 종이였다는 생각이었다. 과연 결과는 어땠겠는가? 재범이 된 노예가 더욱 호되게 혼이 난 건 물론이다. 노예는 종이를 속일 수는 없음을 깨닫고 진심으로 반성했다.

종이의 신성(神性)에 감탄한 게 저 노예뿐이겠는가. “페이퍼 있으면 실컷 쓰는 거지, 페이퍼는 거짓말 안 해….” 신문사에 들어와 보니 많은 이가 종이 신봉자였다. 취재할 때 뭔가가 적힌 종이를 얻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님 방미 전에 제일은행 매각이 성사되도록…” 청와대 수석이 금융감독위원장실로 보낸 팩스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어이가 없었다”라고 회고록에 적었다.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하시라” 화를 내며 종이를 찢어버린 데에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기를 끄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중 ‘바리스’라는 이는 최고의 도둑이었다가 최고의 모사꾼이 된다. 그가 “사람들의 지갑 안에 든 것보다 편지에 든 내용이 값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장면이 있다. 기록이 담은 은밀하고도 불변적인 가치를 극적으로 함축한 말일 텐데, 그나마 종이는 지나간 기술복제시대의 것이다. 이제 종이는 누구나 가진 액정화면 속에 더욱 가득하다. 전화번호, 사진, 막말, 다운로드 내역…. “이직하려는데 이름을 없애야 해요.” 실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던 이들이 수년이 지나 다급한 전화를 걸어올 때도 있다.

믿을 수 없는 국정농단을 실체로 보여준 건 이른바 ‘최순실 파일’이 담긴 태블릿PC였다. 그 조그만 기계 속 일부를 복원해 낸 종이가 셀 수 없는 분량이다. 유언비어는 법적으로 다스릴 것이며 비선실세란 확인되지 않았다는 공식입장들이 이제 무색하다. 신분을 바위 아래 숨겼지만, 편지를 펼쳐 보니 글자 스스로 거짓말을 하진 못하고 있다. ‘아무도 모르겠지’하며 달콤한 열매를 가로채던 노예의 결말은 어떠하던가. 종이의 고자질이라 여긴다면 맞는 생각일 것이다. 야속하게만 여기고 두려워하지 못한다면 저 노예보다 가엾은 처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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