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에게는 부자역할(?)이 있다. 사람들이 “저 사람 부자래”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베푸는 역할을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자역할을 다하려면 역시 사회에 부를 나눠줘야 한다. 우리는 부자가 가치 있게 돈을 쓰도록 기대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자는 누굴까. OO전자, OO차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제일가는 부자는 ‘대한민국’이다. 매년 대한민국과 몇몇 기업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400조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부자는 오롯이 그 400조를 국민들에게 써 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부자로서의 위용(?)이 거대하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한대로, 예산안(일반회계, 특별회계)과 기금운용계획안을 포함하는 ‘예산안’은 국회에서 충분한 심의를 거쳐야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행정각부와 공공기관이 준비하고 기획재정부의 깐깐한 심사를 거친 ‘예산안’은 아쉽게도 최종적인 ‘예산’이 아니기에, 국회의 역할이 남아 있다. 연말이 되어 국회가 예산안을 확정하면, 대한민국의 제일 부자(?)가 공익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재원이 확보된다.

그런데 매년 10월부터 12월까지 국회에서는 전쟁이 벌어진다. 예산을 둘러싼 첨예하고 힘겨운 전쟁, 예산전쟁 ‘Budget War’이다. 물론 행정부처와 공공기관들은 기재부와도 험난한 협상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국회로 넘긴 예산안을 그대로 확정하고 싶어 한다. 반면 국회는 정부의 예산안을 평가하고, 깎고, 달리 쓰려 한다. 이제 행정부처, 공공기관 등과 국회의 예산전쟁은 무수한 전투와 소강을 반복하면서 지루한 당김과 쏠림을 반복하기에, 회의장에는 패잔병처럼 저마다의 관련자료가 수북하게 쌓인다. 하지만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다. 종종 행정부처나 공공기관은 기재부를 통과하지 못한 사업들을 국회에서 해결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국회의 예산전쟁에선 아군과 적군의 깃발이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

여기서 잠깐. 또 다른 복병들이 있다. 무려 400조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얹고자 나타난 군웅(群雄)들이다.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각지에 할거한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과 관련하여 정부 예산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노골적인 ‘PIMFY(Please in my front yard)’의 목소리인데, 도로, 항만,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사업부터 특별지역지정, 토지·택지개발, 기관유치, 시설 설치·보수·개선·확장 등과 관련된 교부·지원사업까지, 특정 지역과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사냥감(game)이 된다. 지방자치단체도 예산전쟁에서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전투(?)를 벌이는데, 그 무차별적인 파상공세는 종종 행정부처와 국회를 흔들어 놓는다. 제18대 국회에서 OO지역에 많은 예산이 배정되었을 때 ‘형님예산’으로 불리며 행정부처와 다른 지자체의 질시(?)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

얼마 전 한국을 찾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긴축 정책을 일찍 사용한 나라부터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되고 있다. 향후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국가가) 대규모 재정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제 우리의 부자, 바로 ‘대한민국’의 부자노릇을 기대해볼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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