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대부분의 시간을 현실에서 지나치는 사건들 속에서 보낸다. 흐르는 물과 같은 현실의 흐름안에 몸을 맡기며 생활하기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항시 의식하지는 않는다. 한편 보편적일 것 같은 당위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한다. 당위 역시 강물처럼 흘러가는 자연의 일부로 보인다. 자연의 세계는 인식의 보편적인 환경이다.

자연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 사이에서 심미감의 향유로 가교를 놓으려 하기도 하지만 타인과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기에 당위의 세계에 한발을 들여놓을 수 밖에는 없다. 철학자의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목적이나 종교인의 권위의 원천으로서의 신을 통해서 당위의 세계를 이끄는 합목적성이 해명되고 이 목적에 의해서 형성된 질서 안에서 인간 정체성이 규정된다.

근대 이후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법률가에게 하는 것은 현대인의 정체성은 주체로서의 개인의 권리를 규정한 법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근대적 자아(自我)는 재산권이라는 수단을 확보하여 권리를 지닌 주체이고, 헌법적 합의로 형성된 국가의 법질서와 국가간에 형성된 법체계안에서 존재한다. 근대의 개인은 권리를 주장하는 자이다. 어떤 당위 개념과 마찬가지로 법이 부여하는 정체성의 기초도 법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한다.

당위를 추구하는 철학적, 종교적 시도들은 근대 이래 축적된 지식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서 새로운 당위의 형성을 계속하여 시도한다. 대중 사회는 세속적인 힘에 모든 것을 기대는 경향이 있으므로 정치가 철학과 종교의 역할을 흡수하여 이를 짊어지고자 할 때에 정치는 당위를 형성하는 권위를 보유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당위는 정치적 협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 사회에서 당위를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협상이 일치된 결론에 이르지 못할 때 정치는 그 책임을 타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유난히 법률가의 영역으로 문제가 넘어오는 것은 현대 사회가 개인의 정체성을 법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당위에 대한 결정권을 움켜쥔 정치가 법률가의 영역으로 문제를 미루지만 당위의 근거가 확정되지 아니하고 유동적일 때나 넘어온 문제가 처음부터 법의 영역의 것이 아님에도 따라 들어온 것일 때에는 이를 해결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위를 해명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제기된다.

대중사회는 힘에 의존하려 하지만 책임을 지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대중사회에서 정치는 모든 영역을 흡수하여 최종의 결정 권한을 가졌지만 정치적 결론에 이르는 것은 쉽지 않다. 권리를 주장하지만 권리의 원천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모든 문제를 정치 문제로 다루어서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종결짓는 경향이라는 것은 아무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위의 세계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서 모두가 속한 자연의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회남자(淮南子)는 도(道)를 물(水)의 흐름에 빗대어서 수하유부쟁선 고질이불지(水下流不爭先 故疾而不遲 ;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앞을 다투지 않기에 오히려 빨리 흐르고 지체하는 일이 없다)라고 표현한다. 자연의 세계에 순응하여 흐름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당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그 흐름 안에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도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앞서기를 다투지 않는다(유수부쟁선 ; 流水不爭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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