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2억명에 달하는 한국영화 관객수는 영화가 한국인의 중요한 대중 오락의 하나라는 사실 및 한국 사회에서 영화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선과 악이 분명히 드러나는 세계에서 억압을 당하는 구조적 모순에 대항하여 착한 무리가 저항하다가 승리를 거두거나 또는 승리해야 한다는 당위를 담은 단순한 줄거리는 쉽게 이해되고 카타르시스를 준다는 점에서 마케팅 측면으로는 탁월하다. 그러나 세상을 단순하게 해설하고 원하는 것만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진짜 문제를 못보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한편 정치적으로 진영 논리와 결합하여 특정한 정치 세력을 반대 또는 옹호할 때에 영화는 선전수단으로서 정치 도구가 된다. 문화가 정치에 이용될 때 예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횡행하는 것을 가까운 중국의 10년대재앙에서 보았다. 중국 지식인 계선림은 문화혁명이라는 재난을 10년대재앙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엔터테인먼트가 정치 수단이 될 수 있음은 콘텐츠를 통해서 제작자와 관객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그래서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에서 공론화되고 표현의 자유가 거론된다. 쌍방적인 교류를 이상으로 하는 소통은 대개의 경우는 일방향으로 흐르기에, 소통이라는 명분하에서 일방적인 선전이 자행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는 선전 공세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보아야 엔터테인먼트에 불과하다고 둘러대지만, 표현의 자유가 거론될 경우에는 대부분 놀이를 전제하지 않는 진지한 분위기가 배경에 있다.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현상은 영화의 큰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는 항상 영향력에 주목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예술은 공론장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그럴듯한 표현을 내세워서 실천된다고 하더라도 그냥 선전이며 정치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

콘텐츠가 제공하는 효용은 즐거움이다. 엔터테인먼트는 무목적성의 영역이다. 이완과 몰입을 통해서 얻게되는 쾌와 불쾌의 감성이 혼합되어 구현되는 즐거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심미감이 목적과 만날 때, 목적으로 가득찬 화면은 특정한 정치적 관점을 현실세계라는 환상과 함께 제공하면서 영화를 통한 구원을 시도하지만, 영화는 현실이 아니며 그곳에서 구원을 이룰 수 없고 구원의 예언도 성취되지 않는다. 목적을 추구하는 홍위병의 예술은 더 이상 관객의 것이 아니다. 예술은 작품을 즐기는 관객의 것이기에 이를 즐기는 사람의 것이다.

칸트는 미(美)를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으로 정의하였다. 즐거움은 무대에서 일정한 거리를 둔 객석에서 느끼는 것이며 홍위병이 거론하는 소통은 무대위에서의 일방적인 선전일 뿐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만이 목적없는 합목적성(Zweckmigkeit?쬸hne Zweck)으로 작품을 즐길 수 있다. 특정한 목적을 제시하며 관객을 일정한 방향으로 계도하려는 홍위병에 의한 정치 선전의 폭거는 없어야 하겠다. 표현의 자유나 공론장을 거론하며 문화의 정치화를 호도하면서 관객과 독자의 관람과 취향의 자유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즐거움은 독자와 관객의 몫이다.

문화가 제공되는 공간에서 표현의 자유는 권리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해석할 때에 독자와 관객의 자유와 충돌하지 아니할 것이다. 문화의 공간에서 무목적성의 즐거움의 자유를 독자와 관객이 누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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