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아 본 것은 1996년 늦봄에 일본 후쿠오카를 방문하였을 때다. 그러고 보니 꼭 20년 전의 일이다. 내가 속한 부산지방변호사회는 일본 후쿠오카변호사회와 자매결연을 하고 매년 번갈아가며 서로를 방문해 오고 있었다. 변호사 5년차던 나는 사무실의 지원으로 후쿠오카 방문길에 오르게 되었다.

낯선 언어와 낯선 장소,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되는 후쿠오카에서의 체류는 부산변호사들의 동행과 잘 짜인 일정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험을 하는 것 같은 긴장과 흥분이 있었다. 그때 부산지방변호사회와 후쿠오카변호사회가 어떤 주제로 토론을 했었는지는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 뒤 2001년 가을, 나는 홀로 후쿠오카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후쿠오카현 구루메시 남녀평등추진센터로부터 한국의 가정폭력방지법에 관해 발표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였다. 그 즈음에 일본은 ‘배우자로부터의 폭력방지 및 피해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을 앞두고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에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이듬해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심포지엄은 가정폭력방지법 시행에 있어서 앞선 한국이 그간의 경험과 성과를 전해주고 가정폭력 근절을 위해 함께 지혜를 모으는 자리였다. 일본의 가정폭력방지법은 그 명칭에서 짐작되듯이 배우자폭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우리 법보다는 보호대상이나 적용범위가 훨씬 제한적이었다. 시행 4년차에 접어든 우리 법에 대해서도 국내 여성단체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우월한 우리 법제를 설명하면서 나는 내심 우쭐하였다. 적어도 우리처럼 과거와 현재의 배우자는 물론 직계존비속, 계부모와 자녀, 동거 친족까지 망라할 수 있어야 명실공히 가정폭력방지법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2003년 가을, 부산을 방문한 후쿠오카변호사들과의 교류 토론회에서 나는 다시 우리의 가정폭력방지법과 운용실태에 대해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몇번의 법 개정을 거쳤고 현실에서는 여전히 경찰, 검찰, 법원이 가정폭력문제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질타를 받고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교정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시스템이 점차 확립되고 있으며 미미해도 가정폭력 억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후쿠오카 변호사들이 우리 법제의 좋은 점을 보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세월이 흘러 2016년, 부산에서의 교류 토론회를 앞두고 후쿠오카변호사회는 가정폭력에 관한 한국의 법과 제도 등을 배우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 15년 전 구루메에서 일본의 가정폭력방지법을 발표했던 변호사가 이제 후쿠오카변호사회의 첫 여성회장이 되었으니 당연하다 싶었다.

지난 9월 2일, 퍼붓는 비에도 불구하고 후쿠오카변호사들은 부산지역의 가정폭력 상담소와 피해자보호시설, 해바라기센터를 모두 둘러보았다. 질문하고 노트에 꼼꼼히 기록하는 여성변호사들의 모습은 시험을 앞둔 학생들처럼 진지하였다. 후쿠오카변호사회장은 내년에 꼭 후쿠오카에서 만나자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의 법과 제도를 잘 관찰하고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가정폭력이 존재하는 한 후쿠오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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