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는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사상 중 법가의 창시자로 불린다. 난세에 왕권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통치방법으로 법치와 술치·세치를 집대성하였다.

한비자는 옥사하는 불운한 삶을 살았지만 진나라가 법치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하였으니 법치의 효용성이 입증된 셈이다. 한비자의 법술은 제왕의 통치술로써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주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은 부분도 많지만 그가 강조한 법치사상은 지금도 유효한 내용이 적지 않다.

한비자는 사람이 본래 이기심을 갖고 있어서 법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를 억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법이 분명하면 영리한 자가 어리석은 자에게서 빼앗지 못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지 못하며,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지 못한다. 법으로 다스린다면 약자가 피해를 입을 일이 없고, 소수자의 권리도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의 공평한 적용도 강조했다. 한비자에게 영향을 준 상앙도 법을 어긴 진나라 태자의 예외 없는 처벌을 굽히지 않아 결국 잘못 가르쳤다는 이유로 태자의 스승들이 대신 처벌받게 되었다. 그 후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상앙은 사형을 당하였지만 그가 강력히 추진한 개혁법이 결국 진나라의 중국통일에 이바지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비록 한비자가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법치를 강조했지만 군주에게도 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군주가 법을 무시하여 법이 신의를 잃으면 신하들이나 백성들도 법을 지키려 하지 않고 사사롭게 행동하기 때문에 군주 스스로가 위태로워진다. 군주가 법도에 따라 잘잘못을 가려 신상필벌한다면 신하들이나 백성들은 한 눈 팔지 않고 법에 따라 서로 공을 세우려 하고 법을 어기는 일은 없게 된다.

엄격한 법집행을 위해서는 올바른 법을 제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비자는 한 사람의 지혜로는 세상일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지혜를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토론에 붙여서 중지를 모으도록 제안하고 있는데 토론을 생략하면 망설이기만 하고 올바른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법치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민생을 외면한 법과 기계적인 법적용은 반발을 불러 오기 쉽다. 진시황이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축조하면서 엄격한 법제로 중과세와 노역을 강요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홍수때문에 정해진 날짜에 국경수비의무를 지킬 수 없게 되자 참수형을 당할 처지에 놓인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전국통일 후 15년만에 진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대상황이나 민심을 반영하기 위한 법 자체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검토하는 동시에 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구체적인 타당성을 점검하여 법의 생명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겠다.

부국강병과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 법치를 강조한 한비자의 사상은 지금도 나라운영이나 조직관리에 유용하다. 특히 여론을 수렴하여 법제를 만들고 이를 공평하게 집행하도록 강조한 점은 현대 법치주의 사상의 원조격이다. 그러나 저러나 한비자는 성인은 관리를 다스리지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治吏不治民)고 했는데, 청와대 관계자들의 비리와 선거개입, 검사장의 비리, 국민과의 소통부족으로 인한 갈등 상황은 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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