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란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올해 2월에 개봉된 영화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2001년 미국 보스턴 글로브의 신임편집장인 마티 배런은 부임 즉시 ‘스포트라이트’ 팀에게 수십년에 걸쳐 아동 성추행을 일으킨 가톨릭 사제들에 대한 사건을 심층 취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가톨릭의 권위와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하던 보스턴 지역에서 이를 취재하는 것은 지난한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 팀은 피해자, 법원, 검찰, 경찰, 변호사 등을 심층 취재하면서 마침내 30여년에 걸쳐 자행되고 은폐되었던 추악한 내막을 폭로한다. 스포트라이트 팀은 그 공로로 200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위 영화를 보다 보면 불편한 장면과 수차례 마주친다. 수사당국은 사실을 덮기에 바쁘고, 판사는 대놓고 가톨릭 교구를 편든다. 별 다른 이유 없이 법원 기록의 복사가 거부되거나 법원 기록이 사라지기도 한다. 21세기 미국 법원의 실상이라니. 최고 수준이라고 믿고 있던 미국 사법부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한다. 아무리 사법부의 권위가 높다 한들 어두운 구석은 있는 법인가 싶다. 자연스럽게 우리 법조계를 되돌아보게 된다.

현재 우리는 법조비리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있다. 고위 검찰 출신이나 고위직 판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퇴임한 법조인이 변호사라는 직함을 달고 담당 검사나 판사와의 인맥을 내세우며 거액의 보수를 받거나 약속하는 사례가 끊이질 않는다. 이른바 전관예우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 전에 근무했던 법원·검찰의 관할 구역에서 일정 기간 개업을 못 하도록 하거나 사건을 수임하지 못 하도록 하는 규정이 시행되었다. 대법관 출신 법조인에게 변호사개업을 자제하도록 하는 등의 방책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라는 것이 최근의 사태로 밝혀졌다. 어떤 검찰 출신 변호사는 건당 평균 1억원 이상의 보수를 받은 것 같고,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의뢰인의 보석을 조건으로 수십억원을 수수했다. 그 과정에 영락없이 브로커들이 등장했다. 많은 국민이 이런 뉴스를 듣고 경악했고, 대다수의 변호사들은 참담했다. 법원과 검찰은 사무처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으나, 믿어 주는 사람은 없다. 이른바 전관변호사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의뢰인이 그런 거금을 선뜻 건네주었겠는가.

곤혹스러움의 발로일까, 아니면 결과일까. 법무부가 이른바 ‘통합변호사정보제공포털’이란 것을 만들어 변호사의 이력을 공개하겠다는 안을 새로이 내놓았다. 변호사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여 변호사 선임의 왜곡 현상을 시정하겠다는 것이다. 이 발상은 전관예우의 폐단이 브로커의 농간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본말전도(本末顚倒)다. 브로커의 농간이 가능한 것은 법원, 검찰에서 옷을 벗은 변호사가 전관예우라는 관행(?)을 통하여 사건을 주무를 수 있다는 인식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의 복안처럼 변호사의 이력을 공개하게 된다면 오히려 법원과 검찰에서의 경력을 강조하는 용도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법무부가 제공한 신뢰 깊은 정보랍시고, 브로커들이 더더욱 활개 칠게 뻔하다. 청년변호사들이 수임 전선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법조브로커가 근절되려면 전관예우의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전관예우는 어떻게 없애야 하는가? 미국 법조계도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정치·사회적 집단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호사가 떼돈을 벌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확실히 우리나라 법률 시장은 기형적이다. 함께 일을 했다는 과거의 인연이 금전적 가치로 실현되는 틀이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평생법관·평생 검사제’의 논의가 늦게나마 시작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법원이나 검찰 구성원이 외부의 회유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와 유인이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폐해가 뻔한 변호사이력공개에는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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