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화면 속 남자는 자꾸만 테이블 위로 올라가고 싶어 했다. 테이블은 밥상이나 책상으로 사용할 만한 낮은 키였다. 테이블에 올라서면 남자는 두팔을 아래위로 펄럭였다.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마치 남자는 그렇게 말하는 듯 보였다. ‘날개’의 주인공처럼 그도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러나 화면 속에서 벌써 남자는 다른 남자에 의해 테이블에서 끌어내려지고 있었다. 다시 올라서려는 남자의 목을 다른 남자가 팔로 휘감아 죄었다.

버둥거리며 남자는 다른 남자에게 끌려 화면이 보여 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다른 남자가 다시 화면 속으로 돌아 왔을 때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단지 날고 싶어 했을 뿐인데. 불편한 마음은 점점 분노로 커져갔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남자가 테이블로 올라선다. 미처 날갯짓해 보기도 전에 쏜살같이 달려온 다른 남자가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쓰러진 남자의 등허리를 깔고 앉아 다른 남자는 남자의 다리를 힘주어 꺾었다. 화면은 그저 묵묵히 그들을 보여 줄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귀에는 남자의 비명과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였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모 사회복지시설의 CCTV에 담겨 있는 사건이다. 남자는 그 시설에 살고 있는 발달장애인이고 다른 남자는 그 시설의 사회복지사라고 한다. 혐오시설이라며 외딴곳으로 밀어낸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소리 없이 장애인들의 날개가 꺾이고 있었다.

발달장애란 그 연령에서 기대되는 만큼의 통상적인 인지적, 언어적, 사회적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발달장애가 있으면 적응과 소통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거나 충족시키려는 행동이 문제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전문가에 따르면 화면 속 남자가 테이블에 자꾸만 올라가던 행동도 발달장애인의 자기표현이라 하였다. 비장애인들이 보기에는 부적절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해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소통하려는 몸짓이었다. 그런데 시설에서는 발달장애 전문가도 아니고 소명의식이 남다른 것도 아닌 생활재활교사가 여러명을 떠맡아 억압과 통제에만 급급해하며 발달장애인을 가두어 두고 있었다. 거기서 발달장애인의 인권이 존중받고 개별적 특성에 따른 조력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의미의 조력과 지원이 가능하려면 시설에서는 전문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교사, 언어치료사, 물리치료사, 상담사, 사회복지사를 배치하여 협업할 수 있도록 하고 발달장애인에 대한 인권침해가 없는지 서로 감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폐쇄적인 시설에 집단수용하는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 과연 발달장애인의 인권보호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는 점차 대형시설을 폐쇄하고 가정과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Home & Community Based Services)로 전환하는 추세라고 한다. 우리도 폐쇄적인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 중심의 장애인 주거모델개발, 평생교육센터나 지원센터의 설립에 더 많은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하겠다.

발달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살면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가에 부여한 책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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