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화제, 그 유명한 대사,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그 유명한 영화 ‘곡성’을 봤다.

겁이 많아 실눈을 뜨고 베란다 유리창에 비친 화면으로 겨우겨우 봤건만, 아 역시나 셌다. 저렇게 영화를 보니 제대로 영화 내용이 이해될 리가 없어서 결국 인터넷으로 후기를 찾아보고 장면장면을 이해하게 됐는데, 이해하고 곱씹어보니 이건 더 무서운거다.

다음날 아침 긴 머리를 감다 내 머리에 내가 놀라 소스라쳤다. 언제나 그렇지만, 막상 보기에는 귀신이나 끔찍한 장면들이 무서운 것 같아도,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곡성에서도 정말 무서웠던 것은 일광이라는 인간의 사악함, 간악함이었다.

이 무섭고도 흥미진진한 내용을 나만 알고 있을 수는 없어서, 구치소를 함께 가게 된 나보다 더 겁이 많은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아침 한적한 도로를 타고 가며 곡성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다시 무서워졌고,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더 무서워지고, 그 무서워하는 모습에 내가 또 무서워져서 결국 둘 다 많이 무서워졌다.

친구가 접견을 하러 간 사이 혼자 차에 남겨진 나는 곡성이야기를 꺼낸 내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다행히 친구의 접견은 길지 않았고, 그렇게 돌아와서 오후 재판을 마쳤다. 이런저런 일들이 지나가고 퇴근을 앞둔 시간이 되자 나에게 어느새 곡성은 그게 다 뭐단가,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쓰고 돌아서면 또 쌓여있는 서면들, 일일이 수작업으로 골라내야 할 금융자료, 몇년 동안 수렁에 빠진 채 책상 위에서 힘겹게 숨만 쉬고 있는 식물인간이 된 사건, 호흡기마저 곧 떼어질지 모를 다른 사건들까지, 이 잠재된 위험이 어떻게 굴려져서 내 앞에 나타날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실판 곡성이 여기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비행기공포증을 잠시나마 이겨내게 한 것은 사고확률에 대한 논리적인 그 무엇도 아닌,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면 이 순간 사무실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뭣이 중허단가. 아아. 생각할수록 무시무시한 말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