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판례도 일반불법행위처럼 피해자 과실에 따라 배상액을 감경시키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책임제한으로 법리를 바꾸었다. 피해자 과실로 손해가 확대된 경우라면 배상액을 감경하는 것이 손해의 공평부담원칙에 부합하지만 의료사고는 환자에게 책임을 돌릴 사유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질병은 면역력 저하, 고령, 기왕증 등 환자의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이를 사유로 과실상계하자, 의료법정에서 “몸이 약한 것이 왜 내 과실이냐?”는 항의가 있었다.

그 후 법원은 책임제한으로 표현을 바꾸었다. 의료인에게 악결과책임을 모두 물리면 의권 위축, 방어진료로 환자가 치료받을 기회를 잃을 수 있고, 의료과실은 구명과정에서 발생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생되는 사고가 있기 때문에, 법원은 적절한 비율로 배상액을 제한한다.

그러나 책임제한비율에 대해 객관적인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의료인에게 20∼30%만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과잉금지의 원칙 위반이라는 비판이 있다. 수술 중 장애를 입은 사고에 대하여 신체감정 시 기왕증 기여도를 고려하여 노동능력 상실률을 회신하는데, 법원은 그 기왕증을 다시 책임제한사유로 하여 2중 감경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책임을 묻기 어려운 태아분만사고, 건강한 여성의 미용수술사고에서도 책임제한을 하고 그 비율도 큰 편차를 보인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대법원은 단순히 수술의 위험성이 있다는 점만을 주된 사유로 의료인의 책임을 제한한 하급심에 대하여 책임제한 법리위반을 이유로 파기환송하기도 하였다. 대법원은 “손해배상의 범위를 정할 때 과실상계사유에 관한 사실인정이나 그 비율을 정하는 것이 사실심의 전권사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현저히 불합리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책임제한사유를 정형화, 계량화, 객관화하여 판례의 예측가능성을 부여하라고 판시하였다. 그러나 계량화된 객관적 기준이 명백하지 않고, 법원마다 차이가 줄지 않고 있다.

외국에서는 원칙적으로 책임제한을 하지 않고,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배상을 제한하고 있다. 그 근거로 의료인은 질병을 전제로 존재하는 직업인데 질병 그 자체를 이유로 책임제한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부정 내지 신의칙위반에 해당되고, 환자는 의사에게 생명을 전적으로 위임하므로 환자에게 귀책사유를 물을 수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고도의 전문행위인 의료업을 인수하는 순간부터 의료인은 위험방지를 위하여 필요한 최선의 주의를 다하고, 위반 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환자가 진료협력의무를 위반하거나 자해행위를 하는 경우에 한해 책임제한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과도한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게 되면 남소경향, 진료기피, 진료비 인상 등의 부작용이 있다. 반면 지나친 책임제한은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할 뿐 아니라, 무분별한 수술로 인한 인권침해의 위험이 더 클 수 있다. 형사양형기준처럼 의료소송에서도 계량화된 책임제한사유를 만들어 기울어진 법의 저울에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책임제한 법리와 과잉금지의 원칙을 세워야하는 1차적 책임은 당사자주의의 소송구조 하에서 변호사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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