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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기자실]꽃
이범준 경향신문 기자  |  seirot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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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호] 승인 2016.06.20  10: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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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에 국문학과에 들어가 2학년에 시 창작론을 들었다. 이 과목 선생은 서정주와 김구용의 추천으로 등단해 활약하던 현역 시인이었다. 술을 좋아하던 선생은 더러 강의를 빼먹거나 수업 중에 창밖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불만스러워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험시간에 담배를 피워도 되냐는 물음에 교수가 말없이 노려보자, 그냥 담배를 꺼내 물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는 학생의 얘기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김윤식과 정과리다.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고등학생 시절 ‘노동의 새벽’ 초판본을 구해 눈이 붓도록 읽던 리얼리스트이자, 당시 150권 정도이던 ‘문학과 지성 시인선’ 완독을 실천하던 모더니스트였다. 심지어 정과리의 스승인 김현 선생이 살던 구 반포 주민으로서, 김현 선생을 추억하는 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반포치킨에도 드나들던 몸이었다.

학기를 그럭저럭 마치고 기말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어떤 문제가 나오리란 풍문이 있었지만 슬쩍 들어봐도 단숨에 써내려갈 자신이 있었다. 시 창작 이론 수업이지만 시 창작 실습 문제,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나온다 해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시험 날, 칠판에 적힌 문제는 하나였다. ‘꽃 이름을 아는 만큼 쓰시오.’ 선생은 그날도 담배를 꺼냈는데 정작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장미, 진달래, 개나리, 목련, 튤립 몇 가지를 쓰고 나니 끝이었다. 다행히 김소월의 시 ‘산유화’가 생각났다. 바로 그때 선생은 어떻게 알았는지 “산유화는 산에 있는 꽃이란 뜻이지 꽃 이름이 아니다”라고 했다. 흔적이 안 남도록 답안지에서 박박 지웠다. 그야말로 백지를 내고 나왔다. 그리고 나는 배웠다. 이 세상에 이름 모를 꽃은 없다. 마찬가지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전해지지 않은 것이며, 기록되지 않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사에 입사했다. 수습기자 시절 경찰에 출입했는데 좀처럼 취재원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본래 낯을 가리기도 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자를 비롯한 모든 수습기자들이 경찰관들을 형님이라 불렀는데, 유독 나만 그 말이 안 나왔다. 평소에도 누구를 형님이라 부르는 성격이 아니라 공무원에게 그러기는 더욱 어려웠다. 결국 형사님이란 호칭으로 경찰기자 생활 2년을 보냈다.

비슷하게 정치부 기자들은 국회의원을 선배라고 부르지만 나는 반드시 의원님이라 부른다. 꽃들마다 제 향기가 있듯이 사람들도 제 소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전직의 호칭만은 유지했다. 계속해서 검사장님, 대법관님, 재판관님으로 불러왔고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하지만 공직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잠시 스쳐가는 것이다. 오히려 전직으로 호칭하는 것은 전관예우의 단초일 뿐이었다. 늦었지만 부주의한 내가 전관예우의 협력자였음을 자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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