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학과를 나온 남편과 함께 살다 보니 가끔 신제품이나 차세대기술 관련 얘기를 듣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왜 굳이 그런 걸 만들지?’라는 것이다. 쏟아 붓는 시간과 비용 대비 효율성, 시장경쟁력 등을 생각하면 그런 걸 굳이 왜 개발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인데, 남편의 대답은 명료했다.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것이다. 필요나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기술로 해 볼 수 있는 것이니까 해본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렇게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효용성이 지금의 시대를 열었을 것이다. 이제 알파고는 바둑을 넘어 변호사 업계를 넘보고 있고, 화성여행자를 모집한다는 기사도 낯설지 않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스키를 탈 수도 있다. 그런데, 낯설지 않은 현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점점 인간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꿈을 꾸고 생각을 하며, 노력을 하고 있는데, 왠지 세상은 사람들에게 인간 이상의 것들을 보라며 점점 인간을 잊어가길 강요하는 것 같다.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속 개미들처럼, 누군가 하나쯤 죽거나 우수수 낙오가 되어도 이를 대체할 유용하고 효율적인 개미들이 줄을 서 있고, 기술이 뒷받침된 세상은 그렇게 조금의 미동도 없다.

지난 주말, 딸의 결혼식이 있기 얼마 전 일을 하다 한 쪽 팔을 다쳐 결국 팔을 잃게 된 아버지의 사연이 방송되었다. 그 분의 표정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사회의 일원으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과 참담함이 느껴졌다. 사고였지만, 분명 스스로의 잘못과 실패로 자책하고 계셨을 것이다. 문득, 고장난 로봇들이 도시 외곽의 고철더미 속에 버려지는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고철더미 뒤로 멀리 멋진 가상의 미래도시가 보인다. 기술은 인간을 닮은 로봇을 원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인간에게 로봇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아파도 안 되고, 다쳐도 안 된다. 세상은 눈부시지만 그 세상 속 인간은 한 없이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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