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협력의 상징으로 존재하던 개성공단이 폐쇄된 지 3개월이 지났다. 여러 차례 핵실험과 천안함 사건 등 남북관계의 파도를 넘어 불사조처럼 남아 있던 개성공단이 폐쇄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놀라움이었다. 이전에 핵실험과 천안함 사건 등을 겪어내는 것을 보며 남북 누구도 공단을 닫을 수 없게 되었고 이는 남북 모두에 필요한 검증된 모델이므로 이런 검증모델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말해왔다.

돌이켜 12년 전 처음 개성공단에 관여하게 되었을 때 개성공단은 무엇이었던가, 이럴 거였으면 그간 12년은 무엇이었나 생각해본다.

12년전 개성공단에 관여를 시작하며 중국 심천경제특구의 기적이 혹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했다. 1970년대말 인구 수만에 불과하던 어촌이 개혁개방 이후 천지개벽하여 20년만에 인구 1000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고 외국투자유치와 이를 뒷받침하는 노동, 부동산, 세금 등 각종 법제 인프라가 마련되어 점선면의 확산을 통하여 중국 전국적으로 수천 개가 넘는 경제특구, 경제개발구가 만들어진 결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는 기적 같은 변화가 북한에도 가능하지 않을까 꿈을 꾸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개성공단은 남북관계라는 큰 바다에 던져진 조각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부침에 따라 개성공단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으로 들어갔고 남북관계의 종속변수에 불과하여 12년이 경과하였음에도 124개 기업, 약 5만5000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지극히 억제된 공간으로 제한되었다.

핵실험을 버텨냈지만, 성장하기는 어려웠고 남북관계의 갈등 속에서 생존을 유지하기에도 버거웠다. 핵문제는 언제나 개성공단의 근본 제약이었다. 체제위기에 대한 북한의 공포 때문이었지만, 중국 심천경제특구에서 일어났던 과감한 실험은 일어나지 않았고 개성공단이 체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북한의 우려는 개성공단을 북한 사회와 분리된 섬으로 남게 했다. 개성공단에 대한 북한의 기대와 우려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북한의 어려운 처지가 실감되었다.

그럼에도 개성공단의 성과는 부인하기 어려웠다. 남과 북이 함께 하는 것이 통일이라면 개성공단은 비록 생활 공동체까지 나가지는 못했지만, 분단 이후 최초로 남의 자본과 기술, 북의 노동과 토지가 결합한 생산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은 통일한국의 씨앗으로서 의미를 가졌다. 그 속에서 남과 북의 사람들이 12년간 만나 서로를 조금 더 알아 가게 되었고 특히 개성공단의 법제 인프라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나름의 법체계를 만들어간 것은 의미 있는 성과였다. 라선무역지대법의 전면 개정과 경제개발구법의 도입은 개성공단이라는 실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개성공단은 재개될 수 있을까? 개성공단 없이 라선지대와 경제개발구가 성공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투자유치를 통한 북한의 경제회생은 불가능하게 되며 남한도 개성공단 없이 남북관계를 풀어갈 수 없다는 서로의 절실한 필요를 희망의 근거로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긴 숨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볼 때 가까운 천년의 역사 가운데 분단의 시기는 70년이라는 찰나에 불과하고 이 찰나의 막바지에 있으므로 이 큰 그림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변화를 가져오는 건 역사라는 큰 그림을 근거로 버텨내는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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