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 1차를 준비하면서 다닌 학원에서 그 형을 알게 되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난 주로 수강생이 적은 강의만 찾아서 들었고, 그 형을 처음 본 곳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을 포함하여 수강생이 7명이 전부인 민법 강의 반이었다. 수강생이 적다보니 쉬는 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 와도 7명인 강의에 무려 4명이 안 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참석자는 나, 그 형 그리고 아르바이트 학생. 강사의 난감해 하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괜히 미안해서 졸지도 못하고 앉아 있다가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음료수나 하나 마시려고 나왔는데 그 형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요즘 어린 고시생들은 마인드가 안 되어 있다는 둥, 자기 처음 고시 공부할 때는 강의 빠질 생각은 꿈도 못 꿔봤다는 둥,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던 형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저기… 돈 좀 있으면 빌려줄래?”

자기가 꼭 듣고 싶은 형법 강의가 있는데 이번 달에는 집에서 돈을 안보내줘서 수강을 할 수가 없다고, 꼭 갚겠다고, 우리 연수원 동기가 되어서 함께 일산을 거닐자고 형이 말했다. 당시 고시 초년생이라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던 나는 그날 수업이 끝난 후 15만원을 인출해 줬고 그 뒤로 형을 볼 수 없었다.

시간이 꽤 흐른 후 2차 준비를 위해 신림 9동에서 신림 2동으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우연히 B학원 앞에서 형을 만났다. 뭐 이제 와서 돈 달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 그냥 모른 척 지나가려는데 형이 말을 건다.

“돈 갚으려 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어….”

괜찮다고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잠깐 기다리라며 형이 근처 독서실로 뛰어가더니 잠시 후에 나왔다.

“이거 그때 빌린 돈 갚는다고 생각해.”

고시식당 식권이었다. 그것도 한군데 식당이 아니라 이것저것 섞여 있는 여러 가게의 식권이었다. 안 받으려는 나에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며 형은 억지로 식권을 쥐어 주었고, 덕분에 한동안 신림 9동과 2동을 아우르는 고시식당 탐방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식당을 찾지 못해 사용을 못한 식권도 있었다(‘비둘기 고시식당’은 아는 친구가 없어서 한 장도 사용을 못했다).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나온 식권 몇 장이, 치열하게 살았던 고시생 시절로 나를 잠시 보내주었다. 같이 일산을 거닐자던 그 형은 어떻게 됐을까. 일산을 걸었을까, 아니면 아직 신림 9동 또는 2동을 걷고 있을까. 곧 사법시험이 폐지된다고 한다. 아직 합격 전이라면 꼭 형이 합격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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