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줘.”

트렌스젠더가 주인공인 뮤지컬 ‘헤드윅’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헤드윅은 1950년대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소년 한스가 자유를 찾아 미국에 가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감행하지만, 수술이 완벽하지 않아 여성도 남성도 아닌 채 살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름을 헤드윅이라고 바꾼 주인공은 록밴드를 꾸려 바에서 공연을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이야기의 특성상 의자에 편히 기대어 볼 수 있는 공연은 아니다. 필자 역시 지난 주말 헤드윅 공연을 관람하면서 알게 모르게 불편함을 느꼈다. 평소 성소수자 문제에 관대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정작 눈 앞에 펼쳐지니 편치 않았던 것이다. 반면 공연장 안의 대다수는 헤드윅의 삶을 당연시하고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듯 했다. 2000년대 중반 국내에서 초연된 헤드윅은 팬층이 두터운 작품이어서 관객 중엔 이미 수차례 공연을 본 사람들이 많다. 관객들이 헤드윅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환호하고, 일어나 박수를 치고 함께 뛰는 것이 자연스러운 공연의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다. ‘소수자에 대한 소수자’가 된 느낌이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모두가 잠재적인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를 결정하는 건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장소와 맥락이다. 왼손잡이, 비만, 흡연자, 술 못 마시는 사람, 워킹맘 등 주류 사회나 소속 집단이 요구하는 ‘정답’에 가깝지 않은 특성들은 우리를 소수자로 만들 수 있다. 설사 모든 것이 정답에 가까운 기득권층이라도 나이가 들고 병 들면 소수자가 될 것이다. 결국 소수자를 외면하는 건 언젠가 마주하게 될 나 자신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타고난 모든 것들과 각자의 삶의 방식, 성향에 대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것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헤드윅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그의 남편 ‘이츠학’에게 있다. 이츠학은 원래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여성처럼 입고 행동하길 원하는 ‘드래그 퀸(여장 남자)’이었다. 헤드윅은 “무대에서는 내가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며 이츠학에게 여장을 금지하고 있다. 소수자가 또다른 소수자를 억압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헤드윅은 이츠학을 놓아 주고서야 내면의 자유를 찾게 된다.

소수자 문제는 공존과 이해, 배려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평소 마음가짐이 그렇게 되기 어려운 건 또다른 문제다. 나와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는 일, 삶의 지평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화 생활을 많이 하는 것이다. 최근 극장가에는 동성애자의 사랑을 다룬 영화 ‘캐롤’이나 전시 여성 문제를 다룬 ‘귀향’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소수자 문제가 이미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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