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Art)에서,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이라는 관점은 극명하게 갈린다. 서로 리얼리즘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한쪽은 정교한 복사(複寫)에 가깝고 한쪽은 작가의 관념(觀念)에 가깝다. 그런데, 영어에서 구상(‘Repre sentative’)은 대의제(代議制, ‘Representative’)와 같다. 어쩌면 서양은 대의제를 발명하면서, 현실(현상)을 그대로 반영해달라는 대상의 ‘요구’와 자신들의 정견을 그대로 반영하라는 국민의 ‘의지’가 같다고 본 걸까. 이처럼, 대의제라는 것은 생생한 구상화를 보듯 국민의 뜻(民意)을 왜곡(변형) 없이 그대로 표출해야 한다는 의미로 전달된다.

필자가 일하는 국회는 대의제가 가장 생생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대한민국 각지와 각양각색 분야에서 선출된 300명의 국회의원은 모두가 독립된 ‘헌법기관’이면서 순수한 ‘국민의 대표자’이다. 그럼 대표자라는 것은 현대민주주의의 대의제를 의미하고 대의제는 구상의 관점에서 볼 때 민의를 그대로 반영해야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대의제에서 국민의 대표자(국회의원)는 민의를 늘 살펴 그대로 따라야 할까.

종종, 여론은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과는 다른 정책과 정견을 낸다고 질타를 하곤 한다. 여론이 보기에 대표자는 한 사람의 구상화가처럼 민의를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반면, 국회의원들은 헌법을 존중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해명하는 경우가 많다. 과연 어느 생각이 맞는 것일까.

그 곤란한 질문에 대해 궁리한 생각이, 구상(Representa tive)과 추상(Abstract)이다. 구상화가와 추상화가가 현상과 미적이상을 반영한다고 하지만 어느 것이 더욱 그런지는 판단이 쉽지 않다. 추상도 나름의 미적세계와 가치가 있기에, 양자를 단순하게 비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상과 달리, 구상의 아름다움(美學)은 화가가 목도하고 인식한 상(象)에 되도록 근접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추상은 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구상은 여전히 대상과 끊임없이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구상과 맞닿은 대의민주주의에서도 대표자는 국민의 뜻을 가장 구체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의무(義務, Oblige)를 가지게 된다. 종종 국민의 뜻은 한가지만으로 쉽게 해석되기 어렵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여러 색으로 나뉘듯이, 프리즘(대표자)은 정확한 민의가 어디에 가까운 것인지 본의(本意)와 진심(眞心)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국민의 뜻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색깔이라고 표현해주면 좋겠지만, 매번 의사를 물을 수가 없으니 종종 그 의사가 다른 방향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대의제와 구상이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화가(대표자)가 의무를 버리고 추상의 영역으로 들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결과의 최상보다는 과정의 최선을 찾는 것이 ‘대의제’라면, 앞으로 우리 대의민주주의에서도 제대로 된 구상화가들을 계속 기대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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