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한편의 연극이다. 어떤 종류의 소송이건 재판정의 풍경은 모두 연극의 모습을 띄고 있다. 의뢰인들은 호소력있게 연극을 잘하는 변호인을 선호한다.
재판정의 작가는 당사자들의 변호인들이다. 대본은 원고(原告)가 작성한 원고(原稿)에 피고가 답변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작품이므로 스토리는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한가지 사실을 놓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최첨단화의 길을 걷는 현 시대에서도 과거를 완벽하게 오늘의 일로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리라.
아직도 솔로몬 앞에서 “죽은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는 주장하는 두 기생의 말 가운데 진실을 찾는 것은 쉽지않다.
한편 재판 속 연극은 병들고 아픈 사회 현실이 투영된 장소다. 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들이 재판정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불합리한 인간제도들을 노출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법정을 통해 당대를 향해 전하고 싶은 언어를 토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의 재판정은 극적인 요소를 가능하면 죽이고 서면으로 모든 것을 대체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되도록 당사자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재판장은 의뢰인에게 변호인을 통해 법률적인 형식에 따라 법률언어로 말하라고 주문한다. 변호인의 역할은 일종의 번역가인 셈이다.
간혹 재판정의 이같은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까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된다. 법정이 ‘범죄’사실이 아닌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 ‘범죄인’에 집중하는 것은 법의 세계에서 소외된 이방인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피고인이 아닌 국선변호인이 “나는 그를 죽였습니다”가 최종변론한 장면은 소설을 절정에 도달하게 한다. 까뮈는 당사자가 타자화된 법정의 현장을 비판하려고 했다.
이같은 현실이 재현되지 않기 위하여 연극작품에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는데 변호인들이 힘써야 할 것이다. 법조인의 언어로만 가득한 법정은 갈등이 극복되는 연극무대로 승화하기 어렵지 않을까.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