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취재원들에게 시집(詩集) 선물하는 것을 즐긴다. 대부분 공사다망한 취재원들이 산문글은 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다. 휴식도 되고, 언제든 아무 페이지나 읽고 던져둘 수 있는 점도 좋다. 시집은 주로 도종환, 정호승 등 서정 시인들의 것이다.

시집을 선물할 때마다 곤란한 일이 하나 있다. 책의 제일 첫 장에 ‘이모 씨가 드림’등 내 이름을 적어주는 일이다. 많지도 않은 글자를 적는데 펜이 왜 이렇게 안 떨어지는지. 항상 영수증이나 껌종이 따위에 먼저 까맣게 연습을 하고서야 손을 덜덜 떨며 책 날개를 편다. 연습할 땐 쿨하게, 멋지게 보이던 글자가 꼭 책에 쓰고 나면 ‘초딩 글자’나 다름 없다. 한자(漢字)로도 바꿔 봤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언제부터 손 글씨 쓰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을까? 학창시절엔 제법 글씨를 잘 썼다. 수능 논술 세대라서 원고지에 검은 펜으로 깔끔하게 글쓰는 연습을 수도 없이 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 글자가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급하다고, 많은 것을 적는다는 핑계로 말이다. 스스로 적은 글자도 ‘해독 불가’인 경우가 많아졌다.

결정적으로 손 글씨 쓸 일이 많지가 않다. 언론 브리핑장에서 수첩을 펼쳐 들고 열심히 적는 기자를 한 명이라도 보셨는가. ‘두두두두….’침묵도, 언어도 아닌 노트북 소리만 들릴 것이다. 중요한 인물의 인터뷰를 따야할 땐 당사자의 얼굴과 머리에 스마트폰 수십대가 몰려든다. 받아 적느니 스마트폰의 녹음기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컴퓨터 글자는 ‘글씨의 평등 시대’를 도래하게 했다. 이제 악필이라고 인성까지 오해받는 시대는 갔다. 모두가 ‘신명조’ 또는 ‘굴림’으로 말한다. 컴퓨터 글자는 노동도 덜어줬다. 근육이 끊어져라 받아 적지 않아도 되니 어쩌면 기자들이 기술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신 개성이 사라졌다. 가끔 지체 높은 취재원이 악필인 것을 발견하는 것만큼 소소한 즐거움은 없다. 인간미가 느껴져서다. 카카오톡으로 날아드는 ‘생일 축하합니다’ 문자도 감사하지만 정성 들여 쓴 카드 한장에 비할 수는 없다. 노동량은 또 어떠한가. ‘전우주 노동 총량의 법칙’, 유사 이래 기술이 발전한다고 노동이 사라진 적은 없다. 다만 진화할 뿐이다. 이제 모든 것을 받아적고 정교하게 기록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 끝에 이 글은 손으로 썼다. 하지만 곧 노트북으로 옮길 것이다. 옮기면서 보니 굳이 인류의 역작인 컴퓨터를 마다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끔씩 손에게 펜을 쥐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좀 더 맑아지는 기분이다. 곁들여 또다른 ‘이모씨 드림’을 대비한 연습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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