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인 ‘응답하라 1988’ 열풍에도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올해 신년사는 특정 드라마 제목을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기자는 이 드라마를 안 봐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198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에 헌재소장이 각별히 주목한 이유만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헌재가 국회, 정부, 법원에 이은 제4의 헌법기관으로 탄생한 해가 바로 1988년이다.

1987년 6월항쟁의 결과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민주화 열풍은 법조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헌법위원회’라는 종전의 유명무실한 기관을 대체할 헌재의 등장은 민주화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1971년 대법원이 행정부 반발을 무릅쓰고 국가배상법 조항에 위헌 판결을 내린 일은 이듬해 제정된 유신헌법이 위헌법률심판권을 대법원에서 거둬들여 헌법위원회에 넘긴 직접적 계기가 됐다. 그렇게 사망 판정을 받은 ‘위헌심사’와 ‘헌법재판’이란 용어가 1988년 헌재 창설을 통해 부활의 나래를 폈다.

1988년은 법원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해다. 젊은 판사 수백 명이 ‘사법부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이에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은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후임자로 뽑힌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은 ‘여소야대’ 국회에서 부결됐다.

우여곡절 끝에 사법부의 지휘봉을 잡은 이일규 신임 대법원장은 대법관 진용을 새롭게 짜며 덕망과 실력을 겸비한 재야 변호사를 무려 4명이나 대법원에 영입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사법사상 초유의 사건들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전개됐다.

검찰총장 2년 임기제를 여야 합의로 도입한 것도 1988년이다. 그때까지 정권의 총애를 받은 총장은 여러 해 동안 장수한 반면 정권의 미움을 산 총장은 몇 달 만에 단명했다. 총장 임기제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 보장과 공정한 수사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역시 1988년 창립됐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를 필두로 일군의 ‘열혈청년’ 법조인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치·경제·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군사정권의 적폐 청산에 나섰다.

박 헌재소장은 신년사에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조정·완화하고 국민들의 요구와 기대를 더욱 충실히 반영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1988년 헌재 출범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고 주권자인 국민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하겠다는 각오로 읽힌다. 갈등 해소와 인권 옹호가 어디 헌재만의 사명이겠는가. 우리 법조계 전체가 1988년의 시대정신(Zeitgeist)으로 돌아가 국민의 애정과 신뢰를 회복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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