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케스페아레’. 중학교 들어가 그 이름이 어려워 한글로 풀어서 외웠던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20세기 초엽까지 ‘Shakespear’, ‘Shakspeare’, ‘Shakspear’등 철자가 영국에서조차 혼용되었다고 하니 영어를 처음 배우던 극동의 한 중학생이 희한한 한글 발음화를 시도했던 것이 무리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는 그의 이름을 “창(spear)을 흔들다(shake)”고 생각하여 조상이 창수(槍手)려니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훗날 청년 백수시절, “정직(正直)이 나의 직업”(「리어왕」)이라고 배짱부릴 때가 있었고, 여자 친구와의 작별은 매순간 “달콤한 슬픔”(「로미오와 줄리엣」)이었으니 셰익스피어가 구사한 언어세계가 삶에 미친 영향은 실로 컸다.

그가 올해 서거 400주년을 맞는다. 이태 전 탄생 450년째를 맞아 세계 각국에서 공연, 세미나,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려왔으니 가히 3년에 걸쳐 온 문명세상이 영국 중부의 에이본 출신 음영시인(吟詠詩人, ‘The Bard’)의 음영(陰影)에 잠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일정시대 ‘인육(人肉)재판’이라는 끔찍한 제목으로 국내 초연되었다는 「베니스의 상인」은 물론이거니와, 「햄릿」, 「리어왕」, 「말괄량이 길들이기」, 「뜻대로 하세요」 등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범죄와 이에 대한 응징, 그리고 상속이나 재산권 행사 등을 둘러싼 극의 전개 그 근저에 상당한 법률적 논리가 깔려있다. 즉, 법률가가 아니고선 상정하거나 포착하기 힘든 구성이나 전문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실제로는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 대법관을 역임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이라는 주장까지 한 때 제기된 적이 있다. 이는 같은 시대의 유명 극작가들인 크리스토퍼 말로우, 벤 존슨과 달리 그의 개인적 삶이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아니한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그가 사실은 상당한 자산가로서 채무자들 상대로 소송을 여러차례 제기한 바 있고 또 농산물 매점매석과 탈세혐의로 기소된 사실마저 있다고 하니 스스로의 법적 체험이 작품에 자연스레 반영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가 법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냉소적이다. 한편의 절묘한 법정드라마라고 할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으로부터 돈을 빌린 안토니오가 변제기일을 지킬수 없게되어 계약서 자구대로 살 한 파운드를 잘라내야 할 위험에 처했을 때 재판관으로 변장을 한 포샤는 “누구나 재판만을 쫓는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비’(mercy)에 대하여 빛나는 대사를 뿜어낸다. “자비란 것은 강요될 성질이 아니며, 하늘에서 이 지상에 내리는 부드러운 비와도 같은 것이지요. 자비는 이중의 혜택을 가져다 줍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혜택을 주지요. 자비야말로 최고 권력자가 갖는 가장 위대한 미덕이라 할 것이며, 군왕을 더욱 군왕답게 하는 것은 왕관보다 이 자비심이지요.…말하자면 자비는 신의 속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로써 정의를 부드럽게 할 때 지상의 권력은 신의 권력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햄릿의 입을 빌어서는, “저것이 법률가의 해골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리. 능숙한 그의 궤변은 어디로 갔는가? 그의 뛰어난 펜대놀림, 사건들과 법대 그리고 속임수는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일갈하고, “재판하는 일을 삼가라, 우리 모두가 죄인이다”(「헨리6세」)라고 언명함으로써 법률가들을 향해 비수를 들이댄다.

올 정초 한국에서의 셰익스피어 축제는 국립극단의 「겨울이야기」(Winter’s Tale)로 개막되었다. 근거없는 질투심이 광기로 번져 처자식을 다 잃게된 시칠리아의 군주가, 진실한 참회로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아내와 딸을 재회한다는 이른바 ‘비희극’(Tragicomedy)이다.

헝가리 출신 로버트 알폴디의 실험적이고 박진감있는 연출로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무엇일는지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한국 사회는 지금 지역, 계층, 이념, 연령별로 갈가리 찢겨만 가고 있다. ‘헬조선’이라는 체념의식이 우리를 무겁게 누르고 있음에도, 그 갈등과 대립을 재단하고 봉합하며 치유방안을 제시해야 할 법조계와 법학계조차 고시파, 비고시파, 로스쿨파로 나뉘어져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자에는 자로」 중 다음과 같은 대사가 병신년 원숭이해를 맞는 우리들의 귀를 때린다. 매우 아프게.

“오만한 인간은 겨우 한 동안 권력을 빌려있는데 지나지 않으면서, 자기가 유리처럼 취약한 존재라는 뻔한 사실도 알지 못하고, 성난 원숭이같이 터무니없는 장난을 하느님 앞에서 제멋대로 해대며 천사들을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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