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윤 지음, 박영사, 2016

 

 

 

 

 

 

 

신문사에 입사하면 수습교육을 받는데, 이 교육은 경찰에 출입하는 선배기자들이 맡는다. 이 과정에서 선배기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게, 구속영장의 신청과 청구다. 법대출신이 아닌 이상 한번쯤은 ‘검사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쓰거나 말하게 되는데,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선배기자는 욕설을 해댄다. 실제로 형사소송법 제201조 제1항에는 ‘검사는 관할지방법원판사에게 청구 (중략) 사법경찰관은 검사에게 신청’이라고 돼 있다. 혼쭐이 난 수습기자는 “검사는 청구, 사경은 신청”이라고 적어 두고 외우게 된다. 하지만 헌법 제12조 제3항과 제16조를 보면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라고 나온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 입사해 기자 3년차에 처음으로 법조문이란 걸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재판을 취재하고 수없이 판결문을 읽으면서 법의 언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법학 교과서를 읽기 시작했는데 기본적으로 얄팍한 수준이기는 해도, 실체법보다는 절차법이 이해하기 쉬웠다. 가령 민법총칙이나 형법총론을 봐도 도대체 이게 재판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판례를 읽으면서 사건의 개요와 법원의 결론에만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절차법은 딱히 의문이 드는 게 없었다. 소송이 다 이렇지 이게 무슨 이유가 있겠나 싶었다. 취재를 통해 나도 모르는 사이 절차를 암기해버린 것이다.

이런 수준이었던 소송법에 대한 인식을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가 바로 이시윤 전 헌법재판관이다. 나는 서른다섯 되던 해에 신문사를 떠나 헌법재판소 역사를 취재해 ‘헌법재판소, 한국현대사를 말하다’라는 책을 냈다. 초기 재판소의 역사를 기록하려 거의 모든 결정문을 읽고 재판관들을 만났다. 이를 통해 헌법재판의 토대를 세운 주인공이 소송법학자 이시윤임을 알았다. 오랜 군사 독재의 악습을 철폐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 재판소에도 사회에도 세밀한 질서가 있어야 했다고 그는 믿었다. 예술의 운명은 형식에 달려있다고 믿는 문학도이던 나는,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절차가 좌우한다고 믿게 됐다.

지난 1월 출판된 ‘민사소송법 입문-역사, 사례와 함께’는 노년의 이시윤이 펴낸 역작이다. 대가 중의 대가답게 그는 민소법을 이론의 세계에서 생활 현장으로 간단히 가져온다. 소송법 이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현실에서는 왜 바뀌고 뒤집혔는지 128개 역사와 판례로 풀어낸다. 쉽고 재미있어서 ‘민사소송법입문’이라는 제목이 과하게 느껴질 정도다. 소송법 교과서이지만 대한민국 법조계의 비사로 가득하다.

1974년 10월 대법원은 내란예비음모로 기소된 김대중이 제기한 법관기피신청 기각 즉시항고를 파기환송한다. 이유는 심리미진이었는데 두달 뒤인 12월 서울고등법원은 1심 재판장인 박충순 부장판사에게 공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유가 있다며 기피신청을 인용한다. 이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한 민복기 대법원장은 서울고법 재판부에 대해 징계성 인사를 단행한다. 부장판사를 대구고법으로 인사하고, 주심 판사는 아예 홍성지원으로 보냈다. 주심은 법원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지만 주변의 간곡한 만류로 포기한다. 이 주심판사가 1999년 김대중 정권에서 대법원장에 임명되는 최종영이다. 책을 읽으면서 판사 기피 신청을 기각했던 재판부를 취재해 보았는데, 2000년에 마찬가지로 김대중 대통령이 헌재소장으로 임명한 윤영철 부장판사였다. 이런 내용은 민소법의 법관의 제척·기피·회피를 설명하면서 나오는데, 유명한 형사사건을 인용한 것이다.

검증에 관한 대목에선 이런 사례도 나온다. 1960년대 결혼식을 마친 신부가 20여일이 되도록 신랑집으로 가지 않았다. 신부는 친정에 신랑이 성불구자라고 했고, 신부 아버지는 신랑을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신랑은 진단서를 첨부하여 혼인계약불이행을 원인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대구지법은 원고승소 판결했다. 그러자 신부는 항소심에서 자신이 성경험이 없으며 신체에도 문제가 없다는 경북대학교병원 진단서를 제출한다. 이에 항소심 재판장은 대구 어느 산부인과병원에서 두 사람을 불러 성행위를 시켜보았다. 별다른 성과가 없자 이번에는 병원도 아닌 여관으로 신랑을 불러 다른 여성과 성관계토록 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알려져 부장판사는 의원면직됐다. 헌법 제10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재판활동은 허용되지 않는다며, 증거조사의 한계를 제시한 사례로 나온다.

이 뿐만 아니다. 여전히 부지런한 대학자는 국내외 최신 사건까지 섭렵해 맥락을 알려준다. 지난해 애플과 구글의 소송 취하합의에 대해, “2008년만 해도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구글과의 싸움은 수소핵전쟁’이라고 선언하였지만, (2011년) 잡스가 죽고 팀 쿡의 시대가 되자 접점을 찾아 원만히 끝냈다. 투쟁의 문화에서 상생과 타협의 문화로 바뀌어가는 중요한 모습”이라고 했다.

소송절차의 대가인 저자는 시대의 트렌드는 소취하합의(agreement to dismiss)라고 설명한다. 무조건 재판을 걸어 상소까지 가져가다가는, 이스트만 코닥이나 다우코닝처럼 파산 몰락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과 애플의 경우 단순히 소취하로 사건을 끝내는 것이었는데, 듀폰과 코오롱은 법관의 승인을 받은 재판상 화해를 수반하는 것이었고, 포스코와 신니혼제철의 경우는 내용도 공개되지 않은 재판 외의 화해계약이라고 설명한다.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법개혁에 대해서도 혜안을 보여준다. 세계의 사법행정을 비교해보면 대법원장이 전국의 각급법원을 통괄하는 집중형, 각급법원의 자율에 맡기는 비집중형이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연방지방법원에서 연방고등법원으로 가려면 사퇴서를 내고 새로 취임하는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행정관료조직에서 과장, 국장, 차관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은 승진이라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고등법원 판사들도 관등만 높아진 것이지 직장과 직업이 달라진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 이러한 관료제의 영향 때문인지 승진 고법판사는 항소심 절차의 특수성에 둔감하여, 항소심을 1심을 한번 더 되풀이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복심(覆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얘기는 민소법에서 항소심에 관한 설명에서 나오는데, 당연히 상고심 개선에 관해서도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민사소송법과는 상관없는 부록이 등장한다. ‘한국의 법조삼성(三聖)’이라는 제목이다. 가인 김병로, 화강 최대교, 바오로 김홍섭에 관한 얘기다. 이들의 공통점 다섯 가지를 추려 애절하고 열성적인 말투로 저자는 설명한다. 선진문물을 익힌 선각자, 가난을 이겨낸 청교도적 선비, 공과 사를 냉혹하게 구별함, 투철한 직업적 소명의식, 그다지 좋지 않은 학벌의 소지자다.

부록 ‘한국의 법조삼성’에서 한 문장만 옮기면 이렇다. “젊은 날의 머리와 학벌이 후발 성공의 요체가 아님을 말하여 준다. 위 (전설의 수재) 두 사람에게는 영원은 없지만 위 세 어른에게는 영원이 있다,”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래서 젊은이를 사랑하는 이시윤의 마음이 녹아있고, 이 책의 제목이 ‘민사소송법 입문’임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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