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다가 샤워기를 놓치는 바람에 욕실 사방 팔방에 물이 튀었다. 늘 바꾼다 바꾼다 하면서 바꾸지 못한 커버 없는 화장지 거치대에 걸린 휴지 위로 물기가 잔뜩 묻었다. 눅눅하다 못해 푹 젖어버린 휴지, 말린다 한들 다시 쓰기 힘들 것 같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휴지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았다. 여전히 휴지이고 말리면 다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보송보송한 엠보싱도 죽었고, 마른 휴지의 거칠거칠함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한숨을 쉬면서 젖은 휴지를 빼서 쓰레기통에 넣는다. 샤워기를 놓친 대가다.

오랫동안 끌어온 형사사건이 있다. 피해자는 사실상 모든 것을 잃었다. 직장도 커리어도 이를 위해 들인 모든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반면 피고인은 이 형사사건만 잘 넘기면 자신의 지위를 그대로 누릴 것이고, 앞으로 다시 이런 사단을 벌이지 않으면 승승장구 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종일관 억울하기만 한 피해자를 대리하는 것은 사실 피곤하다. 그 피로감은 잠깐 휴식을 취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피고인은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더라도 공탁이라는 제도를 통해 자신이 반성하고 있고, 합의하려 노력했다는 제스처를 충분히 취했다. 피해자가 아무리 엄벌을 탄원한다 해도 이는 분명 양형에 참작될 것임을 변호사는 안다.

1년 넘게 형사사건으로 억울함을 알리고, 국회 국정감사 의제로 채택되도록 하면서까지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런 마당에 실형을 선고해 달라면서 공탁금도 찾지 않고, 계속 엄벌만 탄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피해자를 대리하면서도 피해자의 시종일관한 이 태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선고기일을 두 번씩이나 연기하면서 합의를 종용한다. 종용이라기 보다는 사실 강요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담당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한 감형 심증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현실적인 선택은 합의를 하는 것이다. 내 설득은 정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당사자와 당사자를 고용한 고용주의 사과라는 것이다.

변호사는 당사자가 아니고, 대리인일 뿐이다. 당사자화 되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변호사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고 배웠다. 그러나 가끔 당사자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합의를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두고 느닷없이 이루어진 한일 양국간의 합의가 떠올랐다. ‘현실적이다’라는 표현이 가지는 비현실성이 느껴진다. 피해자에게 현실은 고통이다. 무엇으로 젖은 휴지 같은 그 신세는 되돌려지지 않는다. 그 고통이 돈으로 위자된다는 법률가의 생각이 과연 현실적이라 할 수 있을까?

상대방이 합의서 초안을 보내왔다. 언제나 합의서는 무미건조하다. 내가 작성을 하든, 상대방이 작성한 합의서 초안을 내가 수령하든 모든 합의서는 건조하고 메말라있다. 거기에 사과는 없다. 돈의 액수가 곧 사과의 깊이이자 크기라는 것일까. 그 합의서를 의뢰인인 피해자에게 전달하면서 위안부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장관님, 내가 은제 돈 받아달라 했는교? 내가 이거 받자고 이래 살아왔다고 보는교?”

아니나 다를까 피해자는 적어도 합의서에 사죄의 표시는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울먹인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피로감이 자리잡았지만 다른 한 구석에는 현실적이라 설득하던 나의 비현실성과 피해자의 억울함과 분함이 함께 느껴졌다. 살풀이라도 하고 싶은 순간이다. 피해자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싫어서 느꼈던 피로감일까. 젖은 휴지는 아무리 말려도 되돌리지 못한다는 그 생각이 들어서일까. 이례적인 합의서를 작성해 본다. 첫 항은 피고인의 사과로 시작한다. 그래도 피해자의 마음이 잔잔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연극 ‘종이인간’은 종이와 같이 연약한 인간을 다룬다. 물이 묻건, 불에 타건 종이는 더 이상 이전 같을 수 없다. 수많은 책과 영화, 연극에서 인간의 강인함을 다룬다. 인간 정신의 강인함이라 해도 될 것이다. 심지어 햄릿도 유약하지만, 끝내 강인함은 보여주면서 막을 내린다. 그렇지만, 인간 본연은 얼마나 나약하고 상처입기 쉬운지 생각해본다. ‘종이인간’은 그런 인간이 주제이자 줄거리이다.

연극 ‘종이인간’은 특이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먼저 줄거리가 없다. 연극을 만든 극단 비주얼씨어터컴퍼니 꽃의 대표 이철성은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연극적 시도를 배워온다. 대사와 줄거리 위주의 연극에서 오브제와 비주얼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종이라는 오브제에 사람을 투영한다. 관객이 직접 무대에 나가 자신을 종이 인형으로 바꾼다. 종이로 바뀐 자아는 배우들에 의해 추앙되고 변형되고 나중에는 사라진다.

사실은 약하디 약한 사람이기에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상처들이 있다. 그것을 내비치냐 아니냐의 차이는 사람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 같다. 결국 상처 입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가끔 남의 일처럼 사건을 처리하다보면 이 단순한 진실을 잊는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적’이라는 틀은 그들에게는 비현실적이다. 합의를 강권하던 항소심 재판장도 이 단순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면 좋을 것 같다.

누구도 합의를 강요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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