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들의 기자실은 2곳인데, 정작 서울중앙지검에 있는 것보다 몇 해 전 신축된 서울고검에 마련된 게 더 크다. 처음 서울고검 법조기자실에 왔을 때에는 ‘서울중앙지검만 해도 벅찬데, 이 큰 건물 곳곳은 언제 익숙해지려나’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조금 지내보니 기자들은 대부분 짐만 고검에 두고 지검의 사안에 집중하는 눈치였다. “고검 쓰레기통 뒤져서 뭐해, 운 좋아야 재기수사명령이지…” 소위 ‘신건 발주’가 드문 고검 검사실에는 기자들 발길이 뜸했다.

고검을 한직(閑職)으로 분류하는 법조계의 관행은 출입기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엄연히 업무보고 순서에서 앞서는 지방검찰청의 상급 기관이건만, 항고사건을 주로 처리하고 직접·인지수사 비중이 낮기 때문에 그러한 시각이 일반화됐다고 한다. 얘길 들으면 들을수록 고검이 설움을 겪은 역사는 실로 긴 것이었다.

1970년대에 검사 생활을 했다는 한 국회의원은 “우리 검사 재직시절만 해도 고검이 ‘양로원화’됐다고 했다. 그래서 모두들 안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2001년 최경원 법무부 장관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나라당 의원에게 이런 질의를 받았다. “호남 출신들이 요직에 절대 다수인데… 그렇다면 거꾸로, 한직인 전국 5개 고검에 근무하는 검사들의 출신지별 인적 분포를 답변 바란다.”

2011년 권재진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에서 차남의 상근예비역 선발을 짚고 넘어가던 한 의원은 고검이란 대목에 이르자 고개를 갸웃했다. “신체검사가 2001년도… 그때 한직이던 서울고검 검사가 병무 선발에 관여할 여지가 없었던 것 같은데….”

인사 때 검사장 숫자가 부족하면 고검 차장 자리부터 비워두던 때도 있었다.

공식석상에서 “(검사들이)고검에 오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사실”이라 말한 고검장도 있다.

소외감을 느낀 이들은 고검을 ‘孤檢’이라 써야 한다거나, 숫제 ‘古劍’이 맞다고 우스개를 했다. 사법시험 수석 출신 검사가 고검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건 유난한 화젯거리가 됐다. 고검 검사들의 경륜을 민사 영역의 전문성으로 키우겠다는 등의 활성화 방안도 거론됐지만, 큰 변화는 없는 듯했다. 함부로 쏟아지는 말들 속에 고검의 자부심은 무너져 갔다.

그 와중에 드물게는 여유로운 삶에 만족한 고검 검사도 있었다 한다. 그래도 소임을 다한 이가 왜 없었겠는가. 대전고검에서 근무하던 박형철 검사는 일처리를 도맡았다고 전해진다. 검찰이 선거법 최고 전문가로 꼽고, 총장감이라는 평가까지 받던 검사였다. 그러던 그는 새해 정기인사에서 부산고검으로 발령이 나자 사직했다. 길지 않은 인사명령의 속뜻을 그가 누구보다 바로 읽었을 것이다. 부산은 하방(下方), 고검은 좌천(左遷)이었다.

고검에 오기 전 원래 그는 끈질기게 국가정보원의 댓글 대선개입 수사를 펼쳤던 검사였다. 국정원의 행태를 신종 매카시즘으로 규정했고,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재판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법정에서 퇴장해버린 적도 있다.

신념이 강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 정권에 밉보였고, 그래서 고검을 전전하게 됐다고 해석하는 이가 많다.

“이렇게까지 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한숨 섞인 그의 목소리를 검찰 동료들이 가슴 아파했다. ‘정권이 주는 메시지’ ‘보복 인사’라는 말들이 한동안 서초동 밥상마다 내려앉았다.

국정원 수사와 징계, 고검 발령을 모두 함께 한 윤석열 검사마저 그를 잡을 수 없었다 한다. 결심의 순간에 박 검사는 검찰이 좋아하는 다산 정약용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정약용은 “벼슬 버리기를 헌신짝 짚신처럼 하는 것이 옛 사람의 의리”라고 했다.

분연한 해관(解官)에 사람들이 공분할 때, 법무부는 모두의 해석을 홀로 모른다는 듯 국회 답변을 했다. “검찰의 인사는 업무 실정이나 역량 자질 등을 고려해 실시한다. 특정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때로는 활성화를 말하고 때로는 유배지로 활용되는 사이에, 고검에 모이는 설움은 과연 누가 짊어지는 것일까.

“이유있읍니다 검사님 판사님. 저는 모든사건의 진실을 발켜달라구 온같서류를 냈건만 한마디 말도 못하고…” 볼펜으로 눌러쓴 다섯 쪽 종이를 부여잡고 고검 민원실 방향을 묻던 할머니가 있었다. 항고장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할머니는 간추리고 또 간추렸다. 이득홍 서울고검장이 퇴임한 지도 오래된 때였는데, 슬쩍 훔쳐본 종이에 여전히 ‘수신자 이득홍’이라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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