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라고 빡빡 우겨 결국 상고심까지 무죄의 판결을 선고받고 쾌재를 부르고 있다가 우연히 의뢰인과의 대화 중에 사실은 유죄가 맞다는 고백을 듣고는 망연자실하는 수가 더러 있다. 비록 본의는 아니었지만 변호사가 진실발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진실을 가리고 허위의 사실인정을 도출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우리의 소송 시스템에서 변호사의 참된 역할은 무엇이고, 시스템 그 자체는 과연 개선의 여지 없이 합리적인 것일까?

달동네에 산다는 어수룩한 차림의 아주머니 한분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막내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인데 오토바이를 훔쳐서 팔아먹은 죄로 구속되어 있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좀 석방되게 해 달라고 한다.

어디 보자. 어, 전과가 두번이나 있네. 두 번 모두 오토바이를 훔쳐서 팔아먹다가 검거되어 처음에는 기소유예처분을 받았고, 두 번째는 보호처분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웬 전과가 그리도 많노. 상습범으로 의율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고, 누가 보아도 구속을 면할 수 없을 정도다. 골치 아프다. 그래도 고3인데 석방시킬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학교생활은 어떤고? 생활기록부를 떼어다 봤더니 의외로 괜찮다. 1, 2학년 때는 개근상, 정근상도 받은 적이 있다.

야, 그렇다면 무슨 수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학과성적은 어떤고?

생활기록부에 학과성적이 ‘4백 몇십분의 3’이라는 식으로 기재되어 있으니 그러면 전체 3등을 했다는 말인가?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녀석이 웬 도둑질? 그런데 그게 그런 것이 아니란다. 전체 인원을 5개 등급군으로 나눴을 때 3등급군에 속한다는 말이란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도 중간 정도의 성적은 되는 셈이군. 이 정도로써 어디 한번 부딪쳐 보기나 하자.

경찰서 유치장으로 접견을 갔더니 아이가 제딴엔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거짓말로 범행을 전부 부인하는 식으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 가지고는 아무것도 될 일이 없으니 우선 깨끗이 자백하는 것으로 하자고 타일렀다. 그런 다음에 법원에 구속적부심을 신청하였다.

판사가 묻는다. 생활기록부의 학과성적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전체 3등을 한 것이 과연 사실이냐고.

시치미를 뚝 떼고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그대로가 아니겠느냐고 딴청을 부렸다. 아무래도 미심쩍은지 판사가 다시 아이에게 묻는다. 공부를 어찌 그리 잘하느냐고.

아이가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맞장구를 친다. 덧붙여서 앞으로 가난한 집안사정을 고려하여 전문대학에 진학하고 기술을 배워 빨리 직장을 잡고 돈을 벌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고 멋지게 장식까지 한다.

속으로 ‘나쁜 놈, 입만 살아 가지고’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판사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틈을 타서 다른 말은 다 집어치우고 어떻게든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도록만 해 달라고 말했다. 비록 손버릇은 나쁘지만 공부 하나는 잘하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는 학교를 탈 없이 졸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매우 걱정스럽고도 진지한 어조와 표정으로.

그래서 결국 석방!

석방된 아이에게 앞으로 다시 같은 짓을 되풀이하여 저지르면 그때는 국물도 없다고 엄히 경고한 후 법정에서 판사에게 말한 그대로 잘 해보라고 타일렀다.

하하하, 이것이 내가 수임하여 처리한 어느 형사사건의 전말이다.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합당한 변호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위계공무집행방해죄의 공범쯤으로 의율될 수 있는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어리숙한 판사를 고약하게 속여먹은 것은 틀림없으니 결코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신부님께 고백하는 마음으로 실토한다. 가감 없이 실토하였으니 어쩌면 관대하게 용서받아 3등급 정도의 변호라고 좋게 평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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